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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Jul 17. 2021

머무른 어제를 딛고 당신과 마주할 내일

정우 오디세이 (2) -<여섯 번째 토요일>과 <뭐든 될 수 있을거야>

1편 - <안에서 밖으로, 다채로운 우리의 한때>


1편에서는 정우의 정규 앨범 [여섯 번째 토요일]이 대체로 품고 있는 과거에의 시선과 시간성을 다루었다. 물론 <나에게서 당신에게>처럼, 멈춘 과거 한 순간의 연장처럼 보이지만 서사적 완결성으로 청자와 연결하여 다른 의미의 '나에게서 당신에게'를 완성하기도 한다. 아직 다루지 않은, 그러므로 이번에 다룰 나머지 두 곡에는 위에서 다룬 상반된 성향이 서로 강조되어 있다.




[온스테이지2.0] 정우, <여섯 번째 토요일>


나 못다 한 안녕


<여섯 번째 토요일>은 단적으로 말해, '과거들에 못박힌' 채 낙엽처럼 지는 몰락 속에 머무르는 이야기이다. 이 곡에서 대체로 내일이나 미래란 존재하지 않으며, 고집스러울만치 어제 혹은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는 가사가 주로 과거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례로 곡의 첫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당신'은 안경을 두고 '갔고', '나'는 작별을 채 건네지 '못했다'. '당신'이 '밝혀 둔' 등불에 '나'는 숱한 인사를 '헤아렸다'. 이후의 가사 역시 대부분 '-ㄴ'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에 그 시선이 머물러 있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속삭이는 시놉시스를 보면서, 60살이 된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해 본다. 올해가 끝나기까지 토요일은 딱 6번 남았다고 한다.


이 곡의 계기가 된 정우의 일기 한 구절이다. 손녀에게 이야기하는 할머니, 20대의 화자에게 말을 건네는 60대의 화자, 고작 6번의 토요일만이 남은 늦가을 어느 날은 모두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시선을 방향짓는다. 한 해가 가기 전 여섯 번째 토요일은 대략 11월 중·하순에 해당하는데,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낙엽 위에 시린 가을비가 촉촉히 젖은 뒤 본격적인 겨울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한 시기의 막바지, 혹은 인생의 황혼에 이른 '나'는 자신 앞에 주어진 시간들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만, '으깨진' 손으로 어떻게든 괜찮다며 안심시킬 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나' 역시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사실, 자라지 않고 오히려 쇠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사실, 지나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이별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나 머물러요


특히 코러스는 '나'의 시선과 행방이 오롯이 '당신' 또는 '우리'의 어떤 과거에서 멈춰버린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당신이 '버려둔 어제', '지친 그 방', '헤진 표정', 그리고 우리가 '놓아둔 어제'와 '녹슨 그 밤'까지. 심지어 애띤(앳된) 낙엽 앞의 당신은 '말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꿈조차 이미 끝나거나 내일을 그리지 못하고 흩어진 채 '쌓이지 못하던' 상태로 남아있다. 위의 표현들은 단순한 과거형이 아니라, 버려지고 지치고 헤지고 놓아지고 녹슬며 (쌓이지 못하고)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얄따란 현재에까지 이르는 몰락을 암시한다.


위의 16마디 이후 이어지는 가사는 조금 시간을 건너뛰어 있는데, 몰락에 휩싸인 어제 같은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나'는, 비슷하지만 다를 수 있는 상황을 서술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어둔 내일', '낯선 이 밤'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여전히 미래에 시선을 던지지만, 결국 이 밤은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다가올 뿐이다. 그렇게 '잠들지 못하던 꿈들'과 '바랜 표정'만이 남고, 흐르는 시간 가운데 '우리', 정확히 말해 '나'는 과거의 자리 그대로 쓸려나간다. 그리고 여기까지 모두 갈무리하는 가사의 말미는 이 모든 상황이 무언가의 '안'과 '아래'에 있어 벗어날 수 없는 처지를 더욱 강조한다.


이처럼 '나'의 시선이 과거에 머물러 있음은 곡 자체에서 음악적으로도 탁월하게 드러난다. 특히 인트로와 벌스를 지나 코러스가 이어진 뒤, 마침표처럼 '나 머물러요'가 스며드는 지점이 인상적이다. 얼핏 굳센 다짐처럼 들릴 법한 '머물러요'의 음이 이어지려는 순간 다시금 코러스가 끼어든다. 그렇게 머무른다는 '나'의 선언까지 합쳐 과거의 과거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위는 서서히 잦아든다.


이처럼 <여섯 번째 토요일>은 음악의 시간성을 활용하여 '머무름'의 몰락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머물러요'가 어제를 넘어선 저편으로 밀려나는 사이 또다른 '기억'이 들어찬다. 머무르되 뒤로 밀려나는 이 구조는 마치 끊임없이 밀려나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불가항력을 안겨주는데, '나'의 시선은 앞과 옆을 지나 온전한 뒤를 향해 있다. 그러나 그뿐일까?


역사의 천사는 미래를 향한 강풍에 쓸려가면서도 과거의 잔해 위에 잔해를 쉼없이 쌓는다고 한다.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알차게 산 인생이 아니라도 괜찮고, 외로워도 괜찮고, 그러다가 지쳐도 괜찮으니까 사라지지만 말자.


본격적으로 공연 활동을 시작하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뿐인데 감명받은 관객들을 마주하면서, 정우는 어떻게든 사라지지 말 것을 다짐한다. 한 철학자의 알레고리에 따르면, 역사의 천사는 미래를 향한 강풍에 쓸려가면서도 과거에 시선을 둔 채 잔해 위에 잔해를 쉼없이 쌓는다. 이처럼 누군가가 머무른 어제는 그저 지나가버리는 것 같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곡에서 새로 치고 들어오는 코러스는 일견 '나'와 '당신'의 시공간에 머문 기억을 뒤로 밀어내는 듯하지만, 결국 다시금 같은 형태를 상기함으로써 가능한 한 그 '머무름'을 영속화한다. 기억할 수 있을 만큼 기억하고, 머무를 수 있을 만큼 머무르며 함께하기. 이렇게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는 단순한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 또는 쉼표이며, 다시금 소환할 수 있는 기억으로서 언제든 아른거릴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함께하는 '우리'로서 과거에 지긋하게 박힌 시선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자리에서 내일을 향한 문을 마련한다.




[온스테이지2.0] 정우,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당신이 늘 깨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벌스와 두 번의 코러스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곡이다. 그러나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짧은 내용 안에는 [여섯 번째 토요일]의 여느 곡보다 뚜렷한 적극성이 드러난다. 


무반주로 시작하는 유일한 벌스 가사에서 '나'는 한없이 수동적인 태도로 시작한다. 가위처럼 몸을 이래저래 펼치거나, 풀처럼 찐득하게 달라붙거나, 스테이플러처럼 캉캉 소리내 짖거나, 지우개 가루처럼 숨죽여 있거나. 웬만해서는 커다랗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문방구를 소재로 한 직유는 물론이고 '~처럼 굴까요', '~할까요'로 끝나는 문장까지. '나'의 태도는 '당신' 앞에서 무얼 어찌할 바도 모르고 결정하지도 못한 채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곡은 최소화한 세션 가운데 스트로크의 미묘한 완급조절을 통해 분위기를 함께 이끌어나간다. 특히 벌스 이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스트로크는 작은 쉼표를 찍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넘어간 다음 순간 '나'의 시선은 급변한다. 벌스의 가사는 현재 상황에서 '나'가 수동적으로 제시한 가능성들이었다. 반면 코러스 첫 부분은 과거로 회귀하며 '당신'을 잃거나 안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가까운 데서 잃고, 아주 먼 데서 안아도 보았다는 이 고백은 단순한 모순이 아닌,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 마음의 관계성을 나타낸다. '나'가 앞서 말한 것처럼 보잘것없고 그저 사용되는 입장의 문구류 따위가 된다면, 혹여 '당신'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안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러기를 거부한다면 영영 '당신'을 잃어버릴까? 혹은 둘 다 아닐까? 한껏 어긋나 보이는 두 진술은 무엇이든 불/가능하리라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처럼 도통 알 수 없었던 '나'의 과거로 미루어볼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어떻게 취하든 확실히 예상되(지 않)는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불확실한 가능성을 '당신'에 대한 요구로 바꾸어버린다. '당신이 늘 깨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에게서 당신에게>의 초연한 부탁 외에, [여섯 번째 토요일] 전체에서 이처럼 '당신'에게 '나'의 바람을 담아 선명히 요구한 문장은 없다. 그리고, 비록 '당신'의 '깨어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나'의 태도 역시 한층 적극적으로 변한다. '그럼 나는 걱정 없이,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한순간의 과거, 혹은 화자 자신에게 집중했던 [여섯 번째 토요일]에서는 '-ㄹ거야'라는 가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나에게서 당신에게>에서 '나'가 '구름의 강', '햇살의 바다'로 가리라는 말 역시, 어떤 의지의 표현보다는 아마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그런가 하면 '혼자서 괜찮을 수 있을 거야'라던 <자장가>의 '나'는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그대'를 향한 그리움에 다시금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곡의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가위, 풀 등의 사물같은 수동성을 벗어나고, 시선 또한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오히려 과거를 계기 삼아 '당신'을 향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나' 의 미래 형태를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여섯 번째 토요일]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능함을 예견하게 한다.




이처럼 [여섯 번째 토요일]은 대체로 그 논조와 시선이 '과거의 연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과거에 머문 그 시선이 단순한 한계가 아니라는 점을 피력한다. 한편으로는 이를 넘어서, '나'에게서 '당신'에게, 과거를 토대로 하여 미래로 넘어가는 어떤 지점을 암시한다. 다음 글 부터는 [여섯 번째 토요일] 이후의 음악을 다루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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