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탈해 Aug 30. 2021

제목은 이랑의 외침으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브레히트를 경유한......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의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는 충격적인 앨범이다. 이런저런 공연과 선공개곡을 포함하여 이미 알던 곡을 포함해도 이 감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곡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의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각 곡들에 즐기고 비평할 거리가 넘쳐난다. 그 중에서도 타이틀곡인 [늑대가 나타났다]가 대표적이며,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보고 싶다.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낯섦으로 시작한다. 익숙한 음계나 연주와 동떨어져 귀를 잡아끄는 첼로 소리와 함께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라는 나레이션으로 운을 뗀 뒤, 노래는 미디움 템포로 서서히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 같은 앞의 문장은 멜로디를 입고 노래로써 흐르려 하지만, 바로 이어 그 여인을 가리키듯 ‘마녀가 나타났다’는 한 가닥 목소리가 돌연 흐름을 찢으며 울려퍼진다. 완만하게 발단에서 전개로 나아가려던 노래는 이 외침으로 인해 잠시 흐름이 끊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첫 문장이 가지는 서사로서의 파토스 자체가 워낙 강렬하므로 이야기는 단절을 금새 회복하고 나아간다.


부자들이 빵을 독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무기(농기구)를 들고 성문으로 몰려간다. 이번에는 ‘폭도가 나타났다’는 한 무리의 목소리가 이를 막아선다. 굶주린 이들은 배고픔에 들판의 콩을 주워먹다 못해 곡물 창고를 습격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외침은 이번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급기야 ‘일하고 걱정하고 노동하고 슬피 울며 마음 깊이 웃지 못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역시 누군가는 또 ‘이단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간주 이후에는 굳게 닫힌 성문 밖에 몰려든 군중이 언급되며 예의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 나타났다는 외침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이후 나오는 진술은 어쩐지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화자의 어조와 살짝 다르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가난한 사람들의 결집과 봉기의 경과가 아니라, 마치 화자가 자기 자신, 또는 굶주린 이들을 대변하여 직접 말하는 듯하다.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짙게 느껴지는 색채는 예리하고 뜨거운 브레히트의 연극론이다. 브레히트는 낯선 중국 사천지방으로 시공간을 옮기는 ‘역사화’로 써낸 <사천의 선인>을 통해 궁핍하고 가혹한 사회적 조건에서 ‘선하게 사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런가 하면 <서푼짜리 오페라>는 그 제목에서 이미 오페라임을 밝히거나 삽입곡이 극의 몰입을 막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는 점에서 연극에의 몰입을 적극적으로 깨는 ‘낯설게 하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브레히트는 연극의 '연극임'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바깥의 사회적 조건을 생각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늑대가 나타났다] 간주 이후의 저 언어는 한결 직접적이고 적극적이다. 권유와 진술을 통해 성문을 에워싼 군중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우리로 하여금 가난을 생각하게 한다. 가난한 누군가와 그 누군가의 가난한 친구들, 우리 중 누군가도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는 부조리, 이를 통해 이어지는 ‘충격’의 필요성까지. 성난 소리가 담고 있을 법한 의미는 정제되어 담담한 평서문으로 불려진다.


비슷하게 중세/근대시기 서양에서 일어난 어느 군중의 봉기인양 ‘역사화’된 [늑대가 나타났다]의 이야기는 돌연 낯설어지며 듣는 우리를 강하게 가리킨다. 가난한 여인과 굶어 죽은 자식, 빵을 빼앗겨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타자로서 접하며 안전하게 느끼던 것은 카타르시스다. 그러나 카메라 렌즈를 직시하고 말하는 듯한 이 대목에서 몰입은 깨지고 생각이 시작된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후에는 다시 성문 앞 군중들이 할 법한 말이 노래를 채운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당신들이 먹는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빚으며, 기껏해야 그 찌꺼기를 먹을 뿐이오. 하지만 내 자식을 굶겨죽일 수는 없소!” 그러나 이미 이들의 상황에 대한 전적인 몰입으로부터 ‘낯설어진’ 우리에게는 이 말 역시 다층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 다층적 효과 중 하나는, ‘~가 나타났다!’며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외침의 무력화와 이어지는 전복이다.




흔히 ‘마녀’하면 이와 결부된 인신공양, 저주, 흑마술이 떠오른다. 처음에 마녀를 규정하는 목소리는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지나가는 가난한 여인에게 내려진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저 울며 동네를 지나갔을 뿐이고, 궁핍과 가난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어 결국 사람을 희생한 주체는 따로 있다. ‘폭도’는 어떤가. 포악스러운 탈취와 이로 인해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드는 이들 역시 따로 있다.


이는 일용할 식량을 습격해 빼앗는 ‘늑대’에도 해당된다. 배고파 들판의 콩을 주워먹다 모자라 곡물 창고에 손을 대는 이들이 늑대일까, 혹은 애초에 약탈의 결과로 ‘곡물 창고’를 세운 이들이 늑대일까. 마지막으로, 굶어 죽는 이들 한편에 성벽을 쌓고 풍족히 지내는 이들을 구성하는 교리와, 이 체제에 분노하여 행동하길 선택한 이들 중에 어느 쪽이 정말 ‘이단’인가.


군중이 닫힌 성문을 에워싸는 장면에서 이미 분위기의 반전은 시작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자도 청자도 이미 이 전환을 읽고 있다. 그 뒤에 ‘폭도가 나타났다’는 외침으로 하나의 사이클이 잦아든다. 그러다가 화자가 직접 말을 거는 시점에서 묵혀둔 문제의식이 언어를 입고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로 폭발할 때 ‘나타났다!’는 외침은 본격적으로 군중의 것으로 전유된다. ‘마녀’ 혹은 마도사나 마인, 폭도, 늑대, 이단 모두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 이름은 아니다. 오직 성 안 사람들만 상상할 수 없겠지만, 노래에 흐르는 외침과 이름은 군중으로부터 튕겨나와 사회적 맥락을 입고 그대로 성 안을 공격하는 언어가 된다.


노래에 흐르는 외침과 이름은 군중으로부터 튕겨나와 사회적 맥락을 입고 그대로 성 안을 공격하는 언어가 된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도 그럴 것이, 군중은 이미 할 말을 다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왜 이러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굴리기에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성 안 사람들의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담그’는 사람이다. 오히려 의식주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다. 포도주의 ‘찌꺼기를 먹을 뿐’인 이들이 손에 잡히는 무기(농기구)를 들고 성문 앞까지 몰려간 이유는 단순하다.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순 없소.” 하던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굶어죽으며, 그 가난이 들불처럼 공감을 얻고 퍼졌을 때, 이 상황에서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은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으며,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빼앗길 뻔한 언어까지 쥔 군중을 우리는 본 적이 있던가.




[늑대가 나타났다] 재미는 마지막 반주와 함께 주기적으로 울려퍼지는 외침에까지 배어 있다. 이미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는 역동적인 드럼과 첼로 소리가 여운을 더하며 예의 외침이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지막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이단 먼저 나타나고 ‘늑대가 나타났다 외침으로 노래가 끝난다. 공교롭게도  제목도 이처럼 ‘늑대가 나타났다 정해졌는데,  사실  문구는 우리로 하여금 동화 <양치기 소년> 떠오르게 한다.


<양치기 소년> 본질은 이것이다. ‘늑대가 나타났다 말은 거짓이며, 이는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는 .  전체를 [늑대가 나타났다] 감쌀  나타나는 효과는,  안에서 흐르는 ‘~~ 나타났다라는 외침 자체에 대한 무력화이다. 실은   사람들, 일명 '부르주아(bourgeoisie)' 만들어내어 외치기 시작한 말들은   말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마녀, 폭도, 이단, 늑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들만 모른다. 그러니 '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같은 말에도 '폭도가 나타났다' 정도로밖에 표현할  없다. 굶주리고 빈곤한 이들과 이들의 친구들이 언어를 발견할 동안 그저  단어에 머물러있는 점까지, '가짜 위기' 호들갑떨며 외쳐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늑대가 나타났다' 이후의  초는 마지막으로 귀를 잡아끄는데, 이전까지의 외침과 다르게 보컬 프라이로 끌면서 미완의 결말을 남겨둔다.


늑대는 나타났는가? 늑대는, 늑대인가?


원작자인 이랑은  곡을 '행진하며 힘차게 따라 부를  있는 노래'로서 기획했다고 한다. 당시 읽던 <캘리번과 마녀> 배경에 힘입어 곡을 구성했는데, "그래, 너희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우리가 나타났다!" 외치면 오히려 시원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당초 '마녀가 나타났다' 결정된 노래는 시간이 지나고 우화의 힘을 빌어 '늑대가 나타났다' 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곡이 '늑대' 중심에 둠으로써 더욱 다채로운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마녀는 처형하고, 폭도는 진압하며, 이단은 색출하여 쫓아내야  이들이다. 그러나 늑대는 기껏해야 사냥하고 쫓아내며 굳이 믿지 않아도  이들이다. 사냥하고 쫓아내도 결국 다시 돌아올 이들이다. 믿지 않는 새에 성문을 넘어설 이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생산을 위한 농기구를 유일한 무기로써 손에 들고, 자식만은 굶기지 않겠다며 몰려든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 곡은 많은 굶주린 이들에게 들려질 노래이며, 곧 그들이 부를 노래이다. '마녀', '폭도', '이단'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꺼이 '늑대'가 되어버린 이들이 부를 노래이다. 친구들의 가난을 생각하며 이 땅에 대한 충격에 공감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더할 노래이다. 그 때에도 정말 '늑대가 나타났다'며 눈을 반틈 가릴지 몰라도,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를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랑은 실로 강하고 선명하고 넓은 노래를 만들었다. 이런 노래가 바꿀 세상을 기대하며 함께 참여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무른 어제를 딛고 당신과 마주할 내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