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ppleLee Apr 22. 2021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공허해요.

왜 살아야 하나요.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싶어요.

오늘 유서를 썼어요.





마주 앉은 내담자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살아내는 것 자체가 참 버겁다.

그럴 때면 토해내듯 뱉어지는 한숨처럼 삶의 고단함도 함께 날아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란다.




대체 어느 누가 삶이 행복이고,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부추겼는지 그들을 찾아가 시원하게 따귀라도 한대 갈겨주고 싶다.



삶은, 산다는 것은, 살아낸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고통이다.


부처는 말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라고. 그러니  스스로 부처가 되라고.


예수는 말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아이러니하게  모두 삶은 행복이라거나, 그래서 살아볼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리석어 행복을 포기하지 못한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거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삶은 한결  수월하고 가벼워질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사람은 엄한 것에 힘쓰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 살아있음을 마음껏 느끼고 누린다.








나 또한 부끄럽지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살아도 산 게 아닌, 죽지 못해 겨우내 숨이 붙어사는 것처럼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이 의미 없는 삶을 끝내고 싶습니다.



그런가? 허허..



웃지만 마시고, 좀 답해주시죠. 왜 살아야 할까요?



왜 살아야 하는진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런데 이건 있어.

모든 생명이 아침에 눈뜨면서 태어나고, 저녁에 눈감을 때 죽는다고 생각한다네.

하루 안에 삶과 죽음이 다 있는 것이지.

뭐 그리 죽고 싶어 하나.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자네는 죽을 텐데.

하루를 살게. 여러 날 살려하지 말고.

너무 애쓰며 살지 말게.

 









죽음으로 편안해지고 싶다는 내담자들은 지금 삶이 지옥과도 같기에 그 삶을 스스로 끝내고 싶어 한다.

그런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다.

무슨 말을 한들 그들의 그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삶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열병과도 같은 고통의 몸부림치는 시간이 있어야만 솟아난다.

그것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저 그들의 고통에 묵묵히 함께 해 줄 뿐이다.

묵묵히, 바보같이.

내 스승이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나조차도 죽고 싶은 내 마음과 이따금 싸운다.


그럴 때면, 이 싸움이 언제 끝날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사람살리는 일을 한다는 내 자신을 향해 환멸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포기한다.

끝낼 수 있다는 착각, 끝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나는 삶의 곳 곳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죽음이란 녀석과 싸우겠구나.

삶은 행복이 아니라, 전쟁이다.

끊임없는 죽음과 삶의 전쟁

내 마음은 전쟁터.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말이다.


결국, 삶이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일지도.




부디, 그대의 전쟁과도 같은 삶 속에 승전가가 울려 퍼지길.. 멀리서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듣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