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번째 이야기
얼마 전 사랑했던 연인의 자살로 30분도 채 자지 못하는 그였다. 설상가상, 실핏줄마저 터진 그의 눈은 그가 지금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제가 살릴 수 있었다 생각하면 괴로워져요. 제가 마지막 통화였대요. 그때 여자 친구를 다독이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게 제일 후회돼요. 선생님, 제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부모님은 벌써부터 걱정이세요. 제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요.'
후회는 언제나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고, 그는 누구보다도 그것에 충실하고 있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얼마나 버거운 지, 나 또한 1년 6개월 전 00 이의 죽음을 통해 알고 있다. 그의 후회와 자책을 공감하기에 그 만큼은 아니었지만 지난 날 나를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할까봐 두려운가 봐요.'
'네'
'그럴 수도 있죠..'
어떤 말로 반응하는 게 그를 위한 것일까? 고요한 마음속 떠도는 생각들 중 적당한 말들을 건져내고 있었다.
'00 씨 미안하지만, 어쩌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흠칫 놀란 듯한 그였다.
'사랑했고 지금도 이렇게나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람이 있기 전과 후가 같을 수 있겠어요. 그걸 자신한테 바라는 거, 그거 너무 잔인한 거잖아요. 미안하지만, 한동안은 후회와 자책하는 시간들 속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같이 잘 버텨봐요. 우리.'
말없이 쳐다보는 그의 눈을 터져버린 실핏줄 위로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그의 마음 같아 보였다.
'어젠 별을 좀 봤어요. 전 힘들 때마다 별을 보거든요.'
'별을 보고 나면 힘든 마음들이 좀 나아지나 봐요'
'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도, 집안에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밤이 깊어지면 늘 별을 찾았지요.'
'00 씨에게 별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오늘 하루 잘 버텼다...'
버텨냈다는 그의 말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지난 시간, 같이 버텨보자 말했던 나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지난 주보다 잠도 더 잘 자고, 밥도 더 잘 먹었어요.'
잠을 못 자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던 터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여자 친구 보낸 지 두 달만에 너무 빨리 제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와도 되나 싶어요.'
한 주 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던 그.
그런 그가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오는 신호들 앞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꿈에 나왔더라고요.'
'그래요? 어떤 꿈이었나요.'
'그냥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꿈속 여자 친구는 어때 보였어요?'
'어느 때처럼 좋아 보였어요.'
'처음이죠? 그 사건 이후 꿈에 여자 친구가 나온 게?'
'네. 기억하라고 나왔나 싶어요. 제가 자꾸 잊어버리니까.'
'그런가요? 00 씨 앞에 어려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네요. 일상으로 회복도 하면서 동시에 여자 친구를 기억해야 하는..'
'네...'
고통을 마주한 사람들이 맞서야 하는 도전 중 하나는 이전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으면 어쩌지.'
누군가는 이 의문 앞에 고통에 버금가는 억압으로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부인, 해리, 격리), 실제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여긴다. 신기한 건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수월하게 일상을 살아낸다. 고통은 본인도 알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 어딘가 묻어버린다. 훗 날 이 고통이 몸이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큰 값 치름을 해야 한다는 치명적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일단 일상은 살아낸다는 단기적인 목표를 이루어내기에 이것만큼 매력적인 대처방식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이 고통 앞에 굴복해 고통이 전부인 것처럼 함몰되어 살아간다. 이 경우에도 고통을 제대로 마주한다고 볼 순 없다. 알코올, 도박 등 그 고통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 헤매고 또 그것을 열심히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 대했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앞의 방식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훨씬 효율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방법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또 혹은 앞서 얘기했던 내 내담자처럼 누군가는 일상을 살면서 그 고통과 마주한다. 쉽게 말해 맞짱을 뜬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면 아파한다. 아파할 뿐만 아니라 이 아픔을 함께 감당해 줄 만한 전문가를 찾는다. 개인적으로 이 행위는 겸손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곳에 고통이 없다 말할 수 없다. 다만,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앞에 두 가지 방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고통을 마주 대한다. 그리고 그 고통에 말을 건다.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닐 때까지 바라본다. 그리고 그 고통 속 귀한 가르침을 건져낸다. 그 가르침으로 인해 삶이 풍요로워진다. 더이상 고통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나의 내담자는 혼자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했고, 용감했다. 별을 보고 잘 버텨내었다고 스스로 위로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나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잘 버텨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날 찾아와 자신의 고통을 들려준다. 이게 웬 떡이고 행운인가. 매 시간 그와 마주 대하는 상담시간마다 배운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부디, 그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 덜 고통스럽길.. 응원한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더 나은 삶으로 당신을 이끌어주길... 간절함 담아 나의 신께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