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정치와 소통이 더 중요해진 시대

기술이 빨라질수록 필요한 것은 '느린 합의'입니다

by 아린

AI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입니다.

AI가 발전할수록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코딩이 아닙니다. 알고리즘이 아닙니다.


합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AI는 빠릅니다. 엄청나게 빠릅니다. 인간이 며칠 걸려 분석할 데이터를 몇 초 만에 처리합니다. 인간이 몇 달 걸려 작성할 보고서를 몇 분 만에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빠른 AI가 어떤 방향으로 달려갈지는 인간이 결정해야 합니다.


방향을 정하는 것은 기술의 영역이 아닙니다. 가치의 영역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미래가 더 나은지. 이런 질문들은 알고리즘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인간끼리 대화하고, 설득하고, 충돌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치입니다.

거창한 의미의 정치가 아닙니다. 가족, 동네, 회사,나라 다양한 층위의 집단과 조직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부딪히면서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AI 시대에 이 과정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AI가 빠르게 실행할수록 방향을 잘못 잡았을 때의 피해도 빠르게 커지기 때문입니다.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AI는 말을 잘합니다. 글도 잘 씁니다. 번역도 잘하고 요약도 잘합니다. 그런데 AI가 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을 읽는 것,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느끼는 것,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통은 언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AI 때문에 인간끼리의 소통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할 때 AI에게 대신 써달라고 합니다. 의견 충돌이 생기면 AI의 답변을 들이밀며 대화를 끝내려 합니다. 관계를 유지해야 할 때 AI가 생성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것이 쌓이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인간과 직접 부딪히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경험이 줄어듭니다. 내 생각이 틀렸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줄어듭니다.

AI가 대신해주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인간이 직접 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직접 만나서 나누는 대화, 오해를 풀기 위해 건네는 한마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이런 것들이 AI 시대에 가장 희귀하고 가장 귀한 능력이 됩니다.


저는 AI와 매일 대화합니다. 어떤 날은 사람보다 AI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AI와 대화가 편한 이유는 AI가 나를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AI가 나에게 반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가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AI가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리함과 좋음은 다릅니다.

사람과의 대화가 불편한 이유는 그 대화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대화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관계는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진짜 합의는 충돌을 거칩니다. 진짜 소통은 오해를 통과합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AI 시대에 가장 강력한 사람은 AI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AI가 할 수 없는 것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인간의 판단이 더 중요해집니다. 실행이 쉬워질수록 방향이 더 중요해집니다. AI가 강해질수록 그 AI에게 무엇을 시킬지 결정하는 인간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희망입니다.


AI 시대에 당신이 더 잘하고 싶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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