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정점에서 빚어낸 사랑의 결정체
나의 유일한 종교는 작품에 대한 사랑,
창조에 대한 사랑,
진심 어린 신실함에 대한 사랑이다.
지난여름, 코트다쥐르(Côte Azur)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프랑스 동남부 지방인 코트다쥐르에는 대표적인 도시 니스(Nice)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쿠아마린 빛의 푸른 바다와 강렬한 태양이 있는 곳이지요. 니스에는 10년 전 배낭여행으로 간 적이 있지만, 한 번 더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코트다쥐르에 니스를 비롯해서 예술가들이 사랑한 소도시들이 많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피카소, 모네, 샤갈, 스콧 피츠제럴드가 머물면서 황금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낸 곳이거든요. 특히 마티스 뮤지엄과 마티스가 디자인한 로사리오 성당을 못 가본 것이 뒤늦게 아쉬웠어요.
코트다쥐르에는 앙리 마티스의 흔적이 참 많습니다. 그의 나이가 48세였던 1917년, 그는 처음으로 니스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됩니다. 처음 머물렀던 집인 보 리바쥬(Beau Rivage) 호텔, 이후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쳐 레지나 아파트(Hôtel Regina)를 구입하여 머뭅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발코니, 오달리스크 장식, 정물화들은 바로 이곳에서 그려진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여생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고 니스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마티스 뮤지엄 근처에 있는 시미에 (Cimiez) 수도원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이 빛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행복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니스를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고 거의 평생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Quand j’ai compris que chaque matin je reverrais cette lumière, je ne pouvais croire à mon bonheur. Je décidai de ne pas quitter Nice, et j’y ai demeuré pratiquement toute mon existence.
_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마티스는 71세에 큰 암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붓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긴 회복기간을 갖게 되는데요. 이때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모니크 부르주아(Monique Bourgeois)를 야간 간호사로 채용합니다. 모니크는 그를 돌보면서 책을 읽어 주고 그와 많은 토론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둘은 각별한 우정을 쌓게 되는데요. 모니크는 마티스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로사리오 성당이 바로, 마티스가 모니크를 위해 디자인한 성당입니다.
내가 당신의 예배당을 짓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책임질게요.
Je vais construire votre chapelle
et je me charge des vitraux.
1943년, 마티스는 니스 옆에 있는 방스(Vence)라는 도시로 이사를 합니다. 그리고, 모니크는 수녀원에 들어가 자크 마리라는 이름을 얻고 수녀가 되어 2년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자크 마리 수녀와 도미니크회 수녀들은 방스에 작은 성당을 지을 계획을 갖습니다. 마티스가 그들을 위해 성당을 디자인해 주기로 하죠. 건축은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와 루이 밀롱 Louis Milon de Peillon이라는 두 프랑스 건축가들이 맡았습니다. 마티스는 스테인글라스와 타일 벽의 대형 그림, 예배단상, 장식과 예배복 등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4년 간 깊게 몰입하여 성당을 완성합니다. 스스로 화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운명처럼 만난 작품이자 최고의 결실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당은 나에게 모든 삶에 걸친 노고의 결실이자, 거대한 노력의 개화이다. 이 작업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내 여정의 끝자락에서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일이다.
Cette chapelle est pour moi l’aboutissement de toute une vie de travail et la floraison d’un effort énorme, sincère et difficile. Ce n’est pas un travail que j’ai choisi, mais bien un travail pour lequel j’ai été choisi par le destin sur la fin de ma route.
_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니스 중앙역에서 30분 정도 기차를 타고, 또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면 방스(Vence)라는 소도시가 나옵니다. 청량한 오션 뷰를 지닌 니스와는 또 다른 감성의 고즈넉한 힐뷰가 펼쳐지는 도시입니다. 왠지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깃들어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성당은 언덕 마을 안에서도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순백의 도자기처럼 곱고 새하얀 성당의 외관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하얗고 각진 형태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창문, 가늘고 우아한 십자가, 마티스의 터치가 느껴지는 세라믹 그림들. 소박하고 단정했던 첫인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유럽의 가톨릭 교회나 성당은 대개 뾰족하게 솟은 천장, 고요한 어둠 속에서 신의 음성만을 기다려야 할 것만 같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하죠. 하지만, 로사리오 성당은 새하얀 외관만큼이나 내부 또한 맑고 싱그러운 느낌을 줍니다. 전시실을 지나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새하얀 벽에 부딪힌 스테인글라스의 알록달록한 영롱한 빛깔에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에는 세 가지 색상의 명료한 대비가 돋보입니다. 노란색은 태양과 신의 빛, 녹색은 자연, 파란색은 지중해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제단 뒤쪽에 있는 메인 창문은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한눈에 봐도 선인장을 형상화한 것 같죠. 척박한 사막 위에서 살아가는 선인장의 저항과 인내, 의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예배당의 곳곳에 마티스의 지문이 묻은 것처럼 그의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단 위의 촛대 또한 마티스의 라인 드로잉을 입체화한 것 같습니다.
(사실 내부는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고 사전에 안내를 받았는데, 막상 들어가니 다들 자유롭게 사진을 찍더라고요. 저도 몇 장 찍었습니다...)
제단의 좌측에는 나뭇잎 문양이 새겨진 좁고 기다란 15개의 창이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창을 통해 바깥의 햇살이 스테인글라스의 푸른빛을 머금고 예배당의 흰 벽에 마치 강물의 윤슬처럼 부딪힙니다.
그 빛이 부딪히는 벽에는 세라믹 그림이 있습니다. 두둥실 구름 사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 그리고 그 옆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을 14개의 장면으로 표현한 십자가의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얀 세라믹 위에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검은색 선으로만 단순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화와는 확연히 다른 신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당과 연결되어 있는 전시관에서는 마티스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요. 성당 설계 과정과 마티스가 디자인한 예배복과 장식들도 볼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다면, 뒤뜰에 나가 흠뻑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탁 트인 마을 풍경을 감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마티스가 디자인한 로사리오 성당은 현대 예술가들을 통해 부흥한 신성한 예술의 흐름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보편적인 삶을 다루는 예술이 늘어나면서 신을 주제로 한 종교 예술이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두아르 마네가 신이 아닌 인간 여성의 나체를 그리면서 터진 스캔들이 큰 계기였지요. 반면, 마티스처럼 교회 장식에 참여하면서 종교 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현대 미술가들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또 다른 유명한 화가로는 성경 속 이야기를 아름답고 환상적인 화폭으로 옮겼던 마르크 샤갈이 있지요.
이렇게 현대에 와서 종교예술은 더욱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사실 마티스는 기독교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성당은 친구였던 자크 마리 수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죠. 그러나 그는 깨닫습니다. 예술,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랑과 신실함, 그리고 초월한 힘을 지닌 종교라고 말이죠. 그는 실재하는 공간의 물리적 크기와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을 통해 무한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로사리오 성당은 마티스가 화가로서의 인생의 정점에서 온 힘을 다해, 순수한 마음과 사랑을 응축하여 담아낸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미술은 분명 환희의 예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종교적이지 않거나 영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당을 만들기 위해 개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내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 의자 또는 과일 앞에서 가지고 있던 태도와 같다.
L’art moderne est certes un art de délectation, mais cela n’implique nullement qu’il n’ait pas un contenu religieux ou spirituel. Je n’ai pas éprouvé le besoin d’opérer une conversion pour exécuter la chapelle de Vence. Mon attitude intérieure ne s’est pas modifiée ; elle est demeurée celle que j’ai eue, celle que j’’ai devant un visage, une chaise ou un fruit.
성당을 만들 때 다른 욕심은 없었다. 5미터 폭의 매우 제한된 공간 속에, 내가 지금까지 50센티미터 또는 1미터 크기의 그림에서 했던 것처럼, 즉 실재하는 사물의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영적 차원의 공간을 새기고 싶었다.
Je n’ai pas eu d’autre ambition lorsque j’ai fait la chapelle. Dans un espace très restreint, puisque la largeur est de cinq mètres, j’ai voulu inscrire, comme je l’avais fait jusqu’ici dans des tableaux de cinquante centimètres ou de un mètre, un espace spirituel, c’est-à-dire un espace aux dimensions que l’existence même des objets représentés ne limite p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