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황금기의 향수로 코르셋을 되살리다
지난 1월 25일, 파리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아래에서 아주 매혹적인 런웨이쇼가 펼쳐졌다. 10분 동안 기립박수가 터지고, 각종 언론에서 찬사가 이어졌다. 바로 메종 마르지엘라 2024 SS 오트꾸튀르 컬렉션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체 억압의 상징 그 자체인 코르셋으로 몸을 과하게 왜곡시키고, 여성 모델의 신체만 가감 없이 노출시킨 의상으로 인해 '예술인가 시대착오적 외설인가'하는 의문 또한 갖게 했다.
예술가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감상자에게는 비평의 자유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지엘라의 예술을 감상하고 내 맘대로 가감 없이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마르지엘라 쇼 감상에 앞서 밝히는 사실은 나는 패션 디자인 전공자도 아니고, 패션 브랜드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예술로써 감상하고 나만의 시선에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의상 자체보다는 쇼 연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이다.
이번 쇼는 파리의 웅장함과 우아함의 상징인 알렉상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III) 아래에서 펼쳐졌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보자르(Beaux Art) 스타일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장엄한 아치와 섬세한 장식 조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과학의 명예, 예술의 명예, 상업의 명예, 산업의 명예를 의미하는 네 개의 금동 조각상은 그야말로 프랑스가 19세기와 20세기에 이룬 영예를 상징한다. 기존 패션 규범을 탈피하고자 버려진 허름한 공간에서 쇼를 열었던 과거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와는 아주 다른 행보이다.
쇼는 보름달이 뜬 파리의 스산하고 어두운 밤 풍경으로 시작된다. 안개가 자욱하고,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을 밝힌다.
이번 쇼의 연출은 프랑스 사진작가, 브라사이(Brasaï)에 대한 오마주이다. 그는 1930년대 안개 낀 파리의 밤거리, 퇴폐와 향락, 그리고 예술로 가득했던 파리의 분위기를 기록했다. 브라사이의 작품과 마르지엘라의 미장센은 가로등만이 빛을 밝히고 있는 골목길, 안개가 자욱한 센강 다리 밑, 서로를 탐하는 짧고 강렬한 하룻밤의 몸짓들이 꼭 닮아 있다. 이 무대에서 갈리아노는 브라사이의 사진 속 파리의 분위기를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려고 노력 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영상에서는 시종일관 긴장과 가쁜 호흡이 이어진다. 흑백필름에 스산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히치콕(Hitchcock)의 미장센도 떠올리게 한다. 쫓기듯 달리던 남성은 코트를 벗고 런웨이 위로 등장하며 영상과 실제 런웨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영상 속처럼 런웨이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있다. 모델들은 따로 설치된 무대가 아닌 다리 밑의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 모델들은 다리 밑 골목으로 등장하여 도박장처럼 꾸며진 실내공간이 오간다. 오프닝의 서사와 연출에서 이미 모든 관객과 시청자들은 고혹적인 분위기에 압도되고 만다. 그리고 이내 1930년대 파리 뒷골목으로 이끌려 가듯 패션쇼를 감상하게 된다.
의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오프닝 영상에서부터 의상까지 갈리아노가 상당히 강조한 것이 있다. 바로, 실루엣이다. 실루엣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형체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요소이다. 코르셋을 주요 디자인 콘셉트로 차용한 이유는 어둠 속에서 신체 라인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이 서로에게 코르셋을 과하게 조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받는 행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코르셋의 타당함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미학적 감상을 해보자면, 1930년대 파리의 퇴폐적인 밤 분위기 속에서 옷의 디테일이나 장식보다도 과장된 실루엣이 보는 이의 시선을 더 쉽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의상의 모티브가 된 또 다른 예술가가 있다. 프랑스 야수파 화가인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이다. 활기차고 대담한 색채가 도드라지는 작가인데, 여성의 초상화, 그리고 도시 풍경을 포함하여, 보헤미안 생활양식을 통해 1930년대 파리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강렬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그 시대의 화려하고 퇴폐적이었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마르지엘라 의상에서 당시 초상화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스타일링과 색채를 발견할 수 있다. 은은한 색감으로 물 든 반투명한 오간자 소재와 늘어뜨려진 프릴이 마치 키스 반 동겐의 붓터치와 닮아 있다.
런웨이가 이어지는 동안 한층 고혹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영국 팝 가수 아델(Adele)의 <Hometown Glory>이다. 아델의 클래식하면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드라마틱한 연출을 완성한다. 가사를 해석해 보면 이번 쇼의 핵심 콘셉트가 ‘노스탤지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신하게 된다.
내 고향 주변의
추억들은 생생해
내 고향 주변의
오, 만난 사람들
내 세상의 경이로움들
나는 도시의 공기가 이렇게 두텁고 희미할 때가 맘에 들어
아마도 갈리아노는 1930년대 예술과 향락으로 피어났던 파리에 대한 강한 향수와 낭만을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에게는 예술을 감상하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작품을 통해 내면에 피어나는 원초적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종합예술과도 같았던 이번 쇼를 보며 내가 느낀 원초적 감정은 황홀함이었다. 현장감 있는 미장센, 분위기를더 짙게 만드는 음악, 단순한 워킹을 넘어선 모델들의 주체적인 연기, 특별히 난해하지 않았던 의상. 누구에게나 가슴속의 황금기일 1930년대 파리의 안개 낀 거리에 모든 것이 다 녹아들었고, 자연스러웠다. 예술은 종종 자신을 파괴하려는 인간의 모순적 본능에서 화려하게 피어나곤 한다. 그 시대의 파리는 퇴폐와 향락 속에서 수많은 예술이 피어났다. 갈리아노의 이번 컬렉션은 당시 파리에 대한 강한 낭만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브라사이와 키스 반 동겐에 대한 완벽한 찬가이자 오마주였다.
그러나, 시대적 맥락에서 비평해보자면, ‘과거에 대한 향수를 넘어서 새로운 실험이나 재해석이 있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오랜 시간 여성의 몸은 남성 권력층으로부터 대상화되어 왔고, 코르셋과 같은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이 자기 몸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 역사가 결코 길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억압과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예술과 섹슈얼리티, 그 사이의 아찔한 경계선 위에서 민감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가슴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미, 체모를 비롯해 신체 부위를 과감하게 노출시킨(실제 노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연상케 하는) 스타일링은 분명 지금까지 여성을 대상화했던 고전적인 방식이다.
허리를 과하게 조이고 있는 이 코르셋이 과연 이상화된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남성모델 마저 자연스러운 체형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곡선을 연출하였다. 이는 갈리아노가 특정한 신체미를 이상적으로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미적 지향점을 현재 이시점에서 그저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브라사이의 사진과 키스 반 동겐의 그림을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이 그림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갈리아노가 이끄는 1930년대 파리 밤거리에 몰입하여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해야 할지, 이 작품이 실제로 창작된 2024년의 시점에서 현대적 가치를 논해야 할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는 감상자의 몫이다. 고전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예술의 한 장르로써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과거를 답보하는 고리타분한 표현이라는 비판적 시각 역시 예술 비평의 한 형태로 인정될 수 있다. 예술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시선 혹은 비평에 대한 조소는 오히려 예술의 세계를 좁히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주체성을 잃고 단지 입을 수밖에 없었던 코르셋이 현대에 이르러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고무적이다. 이러한 질문과 논의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해석은 감상자의 몫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gMJq67ZO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