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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미 Nov 14. 2019

바나나는 바나나우유로 만든 거죠?

틀렸지만 재미있고, 불완전하지만 창의적인

이가 4살이었을 때 1년 정도 회사 부속 어린이집보낸 적이 있다. 집이 회사와 멀어서 주변의 우려가 많었지만 그 당시의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


매일 른 아침 잠들어있는 아이를 그대로 들쳐 안고 잠이 깰까 조심조심 차에 태운 후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사내 식당었다. 잠이 덜 깬 아이와 사내 식당에서 비몽사몽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렇게 하루 시작곤 했다. 헤어지기 싫어 온갖 핑계를 대 어린이집 주변을 배회하 아이를 겨우 달래 들여보내고 나면, 이게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모르게 혼이 쏙 빠던 것도 사실이다. 러나 아이와 함께 시작하는 아침 늘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음에도 그 시간이 싫지 않았던 건, 비록 여유는 없었지만  연령의 아이와 공유할 수 있는 딱 그때의 추억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일 거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어떻게 1년이나 그 먼길을 다녔을까'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이내 떠오르는 추억들로 웃음 짓 한다.



바나나와 바나나 우유


그날도 나는 가능하면 빨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사무실 게이트를 통과해 조금이라도 근무 시간을 인정받고 싶어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었고, 아이는 그런 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바나나조금씩  심지어 녹여 먹고 있었다. 먹는 속도만큼은 아무리 주변에서 서둘러봤자 소용이 없는 아이란 걸 알기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던 그때, 아이손에 든 바나나를 가만히 노려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엄마! 바나나는 바나나 우유로 만든 거죠?"


조급함이 자리 잡고 있던 내 마음에 사랑스러움이 차오르고, 무뚝뚝하게 굳어있던 내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런가? 바나나는 바나나 우유로 만드는 거였나?"


바나나를 바나나 우유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귀여워서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웠다. 완전하지 않은 아이의 세계에서 앞과 뒤 순서가 바뀌고 끊어진 맥락이 엉뚱하게 이어 붙여져 완전히 새롭게 탄생하는 이야기들 내 지식체계심심찮게 자극. 틀렸지만 재미있고, 불완전하지만 창의적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무언가를 하나씩 채워가는 일과 같다. 아니.. 빈 공간으로도 부족하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우주에 빛을 만들고 낮과 밤을 나누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아이의 세계에서는 처음부터 당연한 건 아예 없을뿐더러 기본이라는 개념 또한 없다. 그 빈 세계를 밑바닥부터 채우다 보 아이가 새롭게 배우는 것 못지않게  깨닫는 게 많는데, 주로 '아... 이런 것도 모를 수 있구나', '아... 이게...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이다. 나의 고정관념에 가까운 상식들은 아이의 질문과 함께 순식간에 사방으로 분해되고, 그 파헤쳐진 틈 사이  재미난 상상이 비집고 나온다. 아이는 내게'사실'을 배우고, 나는 아이가 열어준 엉뚱 속에서 익숙했던 것이 혀 다른 것이 되는 '재미'를 얻 되는 거 같다.



내려간 걸까 올라간 걸까

 

그때 즈음 이런 적도 있었다. 날이 춥지도 덥지도 않아 놀이터 가기 딱 좋은 그런 날씨의 주말. 식사를 마친 아이는 아빠와 함께 놀이터에 놀러 나갔고,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아이 이름을 부르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호들갑에 맞춰 깡충깡충 뛰며 좋아할 법도 한데 아이는 뭔가에 놀란 듯 무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나를 올려다보기만 . 무슨 일이 있 싶어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야 엄마~"

"........"

"엄마 손 흔드는 거 안 보여?"

"...... 엄마.. 거긴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방금 전까지 본인이 집에서 엄마와 함께 있다 내려갔음에도, 아이 눈에는 내가 어디 높은 곳에 올라 것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시 한번 깨닫지만 아이에게는 아이의 눈에 보이는 곳 까지가 아이의 세계다.


아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세상에서 없어진 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 자기 눈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세상에서 없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 가득한 울음을 쏟는다고 들었다. 그 '아기'의 세상은 '아'에 따라 여러 곳을 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면서 점점 넓어져간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한번 경험한 공간이라면 그제야 비로소 아이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 되는 거다. 다만 아이의 눈높이로  경험된 공간은 어른인 내가 보는 공간과 경험의 차이가 있고, 공간과 공간이 이어지는 맥락이 불완전할 뿐이다.


아이의 세계 속 공간의 연속성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설명할 좋은 예가 하나 있다. 언젠가 아이에게 밤에 쿵쿵 소리를 내면 아랫집에 사는 할머니가 잠을 못 주무시고 힘드시니 조심하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아이는 눈을 꿈뻑꿈뻑하더니 아랫집 할머니는 어디에 사느냐고 되물었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파트인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는 여러 집을 쌓아놓은 거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매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오면서 우리 집은 4층 높이이고 친구 집은 더 놓은 곳에 있다는 높이의 차이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바닥이 아랫집 할머니네 천장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던 거다.


우리가 4층에 사는 것도 알고, 본인이 놀이터를 가기 위해 내려간 것도 알지만, 엄마가 손 흔드는 저곳이 우리 집일 거라는 생각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이'앎'과 '경험'은 불완전하게 엮여 있다. 그 불완전함이 객관적인 수준으로 완전해지는 과정 또한 육아의 한 면모인 거 같다.



텅 빈 세계를 채우는 일은
아이가 알아서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아이의 텅 빈 세계를 채워 나가는 것이란 걸 깨달았을 때 부모로서 느꼈던 책임감과 부담감은 꽤나 묵직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숨기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 세계의 기초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니 가벼울 수가 없었다. 부담감의 무게에 눌려 생각은 깊어졌고 그 생각의 끝은 너무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깨달음에 닿았다. 아이의 세계는 부모가 억지로 채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있고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맞지만, 아이는 자기의 세계를 채울 것을 스스로 선택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품에 맡겨진 갓난아이를 위해 아이의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로 내가 미리미리 준비하고 그럴싸하게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갓난아이에게 끼치는 부모로서의 나의 영향이 막대하다 보니 돌봄의 역할을 너무 확대 해해서 아이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키가 내 손에 쥐어진 것으로 착각했던 거 같다.

 

아이의 호기심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채워간다. 아들이기에 잘하는 운동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서 5살 때 축구클럽에 보냈었데 처음엔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게 재미있었는지 꽤 즐거워하던 아이는 몇 달 가지 않아 축구 클럽을 그만 다니고 싶어 했다. 끈기의 문제로 번질까 싶어 한 두 달을 더 보내며 관찰하고 아이와 대화한 결과 알게 된 건, 몸이 부딪히는 걸 싫어하는 아이는 공을 향해 달려들어 몸싸움을 해야 하는 축구에 성향상 맞지 않았던 거였다. 하지만 그 후에 아이가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보낸 태권도는 2년째 스스로 잘 다니고 있다.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 건 부모가 맞지만 그걸 자신의 세계에 어떤 모양으로 어떤 위치에 채울 것인지를 결정한 건 아이였다.   


그 어떠한 것도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는 아이의 세계, 온전히 아이 스스로 채워내는 유일무이 세계.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러한 아이의 세계가 조되는 과정 동참하는 일인 거 같다. 그 과정은 때때로 틀리지만 재미있고, 자주 불완전하지만 창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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