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열린 여느 게임 대회중. 주어진 미션을 얼마나 빨리 클리어하느냐로 승패를 가루는 스피드런 종목에서 사건은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한 선수의 캐릭터가 어느 한순간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 해버린 것이다. 게임상의 버그를 이용하는 글리치(Glitch) 플레이가 허용된 대회였고,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유야무야 지나가 버릴 일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동일한 조건을 충족한다면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는 다른 글리지 플레이와 달리 이 순간이동은 그 순간 이후로 단 한 번도 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조차 본인의 캐릭터가 이동된 이유를 모르고 있었고, 결국 수많은 사람이 몇 년간 분석한 끝에 믿기 힘든 결말에 다다랐다. 범인은 우주방사선(Cosmic Ray). 우리는 느낄 수 없지만 우주에서는 수많은 방사성 광선이 지금도 지구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다다르지 못하고 그저 소실되어 버리고, 그중 아주 소수는 우리에게 다다르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배경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니 수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적절한 위치와 시간에 존재한다면 위 경우처럼 게임 내용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나쁘게는 비행기를 갑자기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커다란 비극과 사건들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홍수와 전쟁, 범죄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만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하게 된 데에는 수백만 겹 겹친 우연들이 존재한다. 학창 시절 우연히 앉은 자리 근처 친구들과 가까워져 자연스레 비슷한 취향을 갖게 되고, 여느 날은 괜스레 일찍 일어난 덕에 일찍 길가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 가까워지기도 한다. 친구 중에는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져 우연히 만들어진 팀에서 서로를 알게 되어 결혼한 커플도 있는걸. 그들은 서로를 운명이라 부르겠지만 가끔은 내가 그날 가위 대신 다른 걸 내었더라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상상해 보기도 한다. 살아가며 좋든 싫든 수많은 선택을 강요받지만, 그보다 수배는 더 많은 우연들은 매일 매일 나를 찾아오고 홀연히 다시 떠나곤 한다.
지난 주말, 며칠 전까지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옆 부서 선배가 밤에 든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40대 후반 아직 창창한 나이에 나름대로 성공 가도를 걸어가던 선배였기에 그 소식은 더 크게 다가왔다. 이어져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예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수술받은 적이 있었다는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움. 이른 죽음은 당연히 서글픈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은 본인의 죽음을 본인도 예감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월요일 그의 공개 캘린더에는 아직 그의 존재가 당연하다는 듯 수많은 회의 일정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그는 이 세상에 없었다. 지병이 있었다지만, 그의 죽음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겠지. 모를 일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로 그가 전날 조금 덜 무리했더라면, 혹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 순간 그의 곁을 지켜줄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창창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으리라.
때로는 삶의 모든 순간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결국 삶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그때그때의 우연에 맞추어 제멋대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차라리 그저 운명론적으로 내 삶은 이미 마련된 신의 계획에 맞춰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은 하잘것 없는 나에 대한 계획을 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과거를 헤집어 보며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행동했었더라면 하고 스스로를 책 잡아 보지만, 결국 그 후회의 본질은 내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어 나갈 수 없다는 무기력에 있다. 내 삶은 내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데, 내게 그 소중한 것을 내 의지대로 지켜나갈 능력이 만무하다. 한낱 인간인 나는 그저 열심히 발버둥 쳐 바닷속으로 잠기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우연이라는 파도가 나를 어디로 싣고 갈는지 초라하게 염려할 뿐이다.
오늘 밤에도 수많은 우주선이 내게 쏟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