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구애 받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20대 내 삶의 모토였다. 그 다짐 덕분인지 20대 후반의 나는 9년째 대학생 신분이었다. 핑계는 많았다. 한시도 게을리 산적은 없었고, 아르바이트던, 해외경험이든, 인턴이든 나름 경험한 것은 많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쟁력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 자부심이 무색하게 수십 건의 불합격 소식을 접한 후, 그래 이번 시즌은 망했구나, 한탄하며 여느 취업 특강에 들렀다. 머릿속에 장래에 대한 고민만 가득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뻔한 질문을 던졌고, 강연자의 답은 단호했다. "20대 후반이라면 스스로 밥벌이는 책임져야 한다." 그 한마디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입사 생각 없이 연습차 지원해 두었던 회사 두 곳 중 한 곳에 입사하기로 결심했다. 한 곳은 급여는 꽤 주지만 전혀 관심이 없던 업계, 한 곳은 관심 있던 이커머스 분야이지만 급여가 반토막인 3개월짜리 채용 전환형 인턴 자리.
목포로 가는 길은 춥고 멀었다. 입사를 결정한 곳은 여느 조선 업체의 총무직. 생각지도 않던 지역, 업계, 직무인지라 모든 게 낯설고 생소했다. 이제 와 그림처럼 기억 속에 남은 몇 가지 광경은 음산한 느낌이 드는 어두운 사원아파트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란도란 라면을 먹고 있었던 심야의 편의점 벤치였다. 첫인상은 나빴지만, 막상 입사 교육을 시작하니 마냥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도 이 작은 사회의 피라미드 위층을 차지하는 정규직 사무직이라는 특권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거리끼던 요소들이 운 좋게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운때가 맞은 덕분인지, 마침 티오가 생겨 인사 담당으로 포지션 변경. 것도 모자라 회사의 방침으로 울산에 있는 모회사 소속으로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게 되었다.
불과 몇 주 전 취업준비생이었던 내게는 꽤 그럴듯한 상황이 펼쳐졌다. 울산 소재의 국내 모 대기업의 인사 담당 신입. 내가 꿈꾸던 삶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지만, 객관적으로는 운 좋은 상황이 맞았다. 취업 못 해서 빌빌거리던 과거를 생각하면 감지덕지하고 다니는 게 맞지. 아암. 간만의 신입을 맞이한 인사팀은 내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었고 그런 친절을 보아하니 앞으로의 회사생활도 그리 어려울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연수를 마치고 업무에 배치될 즈음 마음 한편에서는 스멀스멀 아쉬움이 새어 나왔다. 지금의 삶이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아닌걸. 마침 입사를 내심 포기했던 채용 전환형 인턴의 입사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12월 여느 추웠던 날, 신입을 환영하는 회식이 거행되었고, 있는 힘껏 분위기를 맞추고 사원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깨달았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평생 이곳에 머물겠구나."
"대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운 끝에 결론을 내린 나는 새벽 6시 메시지를 남겼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몇 시간 동안 설득 작업이 이뤄졌고, 그 설득의 응하지 않은 나는 어느새 죽일 놈이 되어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도 나는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은 나쁜 놈이 맞았는걸. 그렇지만 나쁜 놈이 되더라도. 미래가 불확실하더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낮이 되어, 짐을 꾸린 나는 KTX에 탑승했고, 며칠 뒤 반토막의 연봉을 주는 해보고 싶던 3개월짜리 인턴 자리로 출근했다.
시간이 흘러 유야무야 결국은 그때의 일이 별일 아니었다는 듯 살고 있지만, 그 몇 주는 내 생에 있어 꽤나 큰 자부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돈이든 안락함이든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증거였다. 긴 시간이 지난 이제와 새삼스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보는 이유는 되려 역설적이다.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연 같은 결심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환경은 그리 변한 게 없는데 그저 나이가 들어 겁이 많아진 탓일까. 과거의 나를 내 삶의 모토로 삼으려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조금 더 포기하고 조금 더 모험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