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이제는 아득해진 대학 생활의 시작을 앞둔 새내기들은 서로의 계명들을 앞다퉈 연설하곤 했다. 그 즈음 한국은 싸이월드 강점기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럴듯한 격언 하나쯤 입 밖에 내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틴어, 스페인어, 영어를 총 망라하여 카르페디엠, 케세라세라, 디스투쉘패스 등 세상에는 그럴듯한 삶의 격언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저 취향에 맞게 그 중 하나를 택일 하여 각자의 삶의 모토 인양 떠들어 대곤 했다. 나는 이렇게 살아갈거야 하는 일종의 자성예언.
"나이에 구애 받지 않는 삶을 살겠다"
그게 나의 첫째 계명이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 수많은 잠언들을 제치고 왜 나이가 첫번째 표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정표를 꽤나 깊게 세운 탓에 여태 그 예언에 맞게 느긋느긋 세상이 요구하는 나이에 꼭 두세살을 덧대어 살아오곤 했다. 첫 시작은 남들보다 반년쯤 늦게 간 군대였고, 그 다음 스텝은 취업 준비 대신 선택한 1년 간의 해외 생활, 하고 싶었던 3개월 짜리 인턴을 위해 1년을 더 휴학하고 나니 어느새 학교 몇 안남은 화석이 되어 있었다. 애써 나이를 외면하려 노력한 탓에 어딜가도 맏이가 되기 일쑤였다. 스물여섯에 시작한 CGV 알바에선 함께 일한 미소지기들에게 어르신 취급을 당하기도 했고, 서른에 들어간 회사 신입 연수에서 매번 팀장에 추대되는 건 당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 또한 나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은 탓에 딱히 어려운 일도 없었다. 회사 선배들은 보통 나보다 서너살은 어린 편이었지만 선배님 소리는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고, 반말을 툭툭 던지던 선배가 내 나이를 알고 머쓱해 할 때도 아무런 사심 없이 씨익 한번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몇살엔 취업, 몇살엔 몇천을 모아야하고, 몇살엔 결혼을 해야하는 소셜 가이드라인을 들을 때도 그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남의 일인양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문득 나이라는 데드라인이 나를 옥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수영장처럼 지금은 말짱하지만 물이 아주 조금만 더 차오르고 나면 숨쉬지 못하고 영영 발버둥 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어디서 이 불안의 이유를 찾아야할까. 가정이 생겨 하나 둘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들을 보며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더 이상 치아로 콜라병을 열 수 없음에 노쇠해가는 내 몸을 발견하기도 한다. 고백 받는 게 일상다반사이던 친구가 소개팅 자리를 찾아헤메고, 함께 회사 욕하며 한잔 하던 회사 동기들은 진급을 앞두고 서로의 고과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더 늦기전에 무언가 결심을 내려 무어라도 해야할까.
어이하여 나는 스무살의 나보다 더 비루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 된걸까. 겁내기엔 그리 잃을 것도 많지 않은데. 혹여 한두해 흘러 진짜 물이 콧구멍을 덮고 나면 나는 그제서야 늦었구나 하고 허우적대는 사람이 될까. 나이가 들면 답을 알게될 줄 알았건만, 알게된 건 끝끝내 답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그 사실 하나뿐이다. 내 시는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