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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May 15. 2024

이빨을 뽑으며

새해맞이를 겸해 치과에 가 스케일링을 받을 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넌지시 사랑니 발치를 권해오곤 했었다. 아직 아무런 불편함도 없지만, 언젠가는 고놈이 옆 치아를 건드려 속을 썩일 수 있으니, 미리 뽑아두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몇 해 동안 그런 권유를 받을 때마다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었는데, 이번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덜커덕 먼 미래에 발치 약속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몇 달 후로 정해둔 이 뽑는 날은 다가오고야 말았고, 나는 내 발로 내 뼈의 일부를 도려내기 위해 치과로 향했다.


어찌 보면 그저 턱이 좁아진 현대인 진화의 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사랑니인데, 나를 포함한 수많은 현대인은 그 막둥이 치아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잇몸 안에서 자라는 이, "살안니"는 어느새 사랑을 알게 될 때쯤 나는 치아라는 뜻을 가진 이름 "사랑니"가 되었고, 서양에서는 Wisdom tooth라는 이름을 붙여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 마케팅의 결과일까, 어찌 보면 나 또한 어느 새부터 사랑니를 뽑게 되는 그 순간을 고대해 왔던 것 같다. 사랑니를 뽑을 즈음에는 무언가 강력한 운명이 내 삶을 휩쓸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어찌 보면 그래서 나는 매번 발치 권유를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치과 체어에 입을 벌리고 앉은 순간부터 그런 로망 따위는 사치가 되었다. 사랑니는 문학적이지만, 발치는 물리적이기에 되도록 고통 없이 내 뼈를 도려내기를 기원하며 가려진 눈을 질끈 감아보았다. 엑스레이 속 사랑니는 마치 어금니처럼 정돈하게 정방향으로 놓여 있었기에 내심 10초 만에 발치가 끝나, 에게 이게 뭐야 하는 기분으로 치과를 나서는 상상을 했다. 허나 상황은 맘처럼 흘러가진 않았다. 마치 박힌 못을 빼내듯 이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도 내 치아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굳건하기만 했고, 빠지지 않는 나무를 벌목하려 사십여 분을 허비했을 때쯤, 땀에 절여진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잠시 쉬었다 할까요?"


체어에 누운 채 작금의 사태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치아의 방향은 좋으나 뿌리가 워낙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어 쉽게 빠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치아를 잘게 잘게 쪼개 조금씩 뽑아나가고 있지만, 완벽히 뽑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솔직한 설명에 될 대로 되라 체념하며 다시 입을 벌렸다. 또 수십 분이 지나 결국 의사 선생님은 발치 종료를 선언했고, 결국 내 사랑니는 잇몸 속에 그 흔적을 남긴 채 찜찜하게 마무리되었다. 사랑니를 뽑은 것도 뽑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애매한 상태로.


결국 답을 내려주는 건 시간의 역할이다. 반년즈음의 시간이 더 흐르면 이가 더 자라 남은 사랑니를 손쉽게 뽑게 되거나, 잇몸이 메워져 영영 잇몸 속에 사랑니를 숨겨둔 채 살게 된다고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이지만, 삶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생각보다 꽤나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 결국 한바탕의 발치 소동 끝에 남은 건 애매하게 떨어져 나간 뼈 덩어리가 애매하게 메워진 사랑니 자욱뿐이다. 뭐 가끔은 더 자라지도 메워지지도 않은 채로 그저 뽑힌 자욱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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