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후 엔 이따금 의미 없는 가정을 늘어놓곤 했다. 우리가 그저 친구 사이였다면 이따위 사소한 이유로 끝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도 종종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 애초에 친구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기에 연인이 될 수 없었다면, 친구조차 될 수 없었겠지만, 어차피 의미 없는 가정법에 개연성이 필요하랴. 그저 이별 이후의 쓸쓸한 공백들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어떤 가정이든 쓸만하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꽤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연인 간의 사랑은 유일해야 하며, 연인은 서로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연인으로서 충분히 친밀하지 못하다는 것은 관계의 결격사유가 된다. 세상 어딘가에 더 친밀한 누군가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 친밀함은 둘만의 것이어야만 한다. 여타 다른 관계들과 다르게 연인은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인정할 때야 비로소 그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런 동의 없이 누군가를 친구라고 편히 지칭하곤 하지만, 누군가를 상대의 동의 없이 내 연인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연인이라는 사이는 서로를 제외한 타인을 배척하며 서로를 독점하는 사이이기에 특별하며, 그렇기에 연인이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은 그 무엇보다 까다롭다.
자격 조건이 까다롭다는 말은 곧 결격 사유가 많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곱씹어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지인이었다면, 친구였다면 문제 삼지 않을 다양한 일들을 핑계 삼아 우리는 이별을 고민하고 이별을 실행한다. 힘들 때 곁에 있지 않아서, 다른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고 싶어서, 서로가 꿈꾸는 미래가 달라서, 어찌 보면 지극히도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하고, 서로를 떠난다.
시작이 어려운 만큼, 헤어짐도 어려운 법이다.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온 시간만큼 상대 마음에 송송히 박힌 상흔을 알게 되기에, 시간이 흘러온 만큼 내가 상대의 삶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 자리에서 생겨날 공백들을 알고 있음에도 상대를 떠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나를 믿고 내게 온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을 무참하게 찌르는 것처럼, 헤어짐을 알리는 한마디에는 크나큰 죄책감이 따른다.
이별 이후에는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짐 이후의 세계에서 연인으로서의 최선은 상대에게 최대한 무심해지는 것이다. 서로가 사랑이 있기 전 일상으로 속히 돌아갈 수 있게 내 마음이 완전히 끝나버렸음을 확실히 보이고, 혹여 미련이 남아있더라도 마치 일말의 여지조차 남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상대의 인생에서 한 가지 좋은 경험으로만 자리 잡는 것.
왜 우리는 우정을 넘어 사랑을 꿈꾸는가. 조금 더 기대하지 않으면, 조금 더 친밀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멀쩡한 관계에만 만족할 수 없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줄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하루하루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 가벼이 끝날 수도 있을 사랑이라 할지라도 뭐 어떠한가. 그러다 운 좋게도 죽기 전까지 가벼이 끝나지 않을 사랑을 만난다면 운이 좋은게지. 그렇게 오늘도 운수 좋은 삶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