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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스타 Feb 22. 2023

Give directly

<어른 김장하 : a man who heals the city>를 보고

  “그래서 말인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응. 필요하면 말해.”     


  삼 년 전, 나는 비가 오는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옆에 붙은 텅 빈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우산없이 바닥을 보며 헤매는 내게 빗방울은 정수리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골에서 근무하던 나는 갑자기 대도시로 전근하게 되어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회사에서 지원은 없었고 내가 온전히 보증금을 내야 했다. 몇 날 며칠 발품을 팔아 겨우 저렴한 원룸 하나를 구했다. 그런데 보증금이 내 전 재산에서 이백만 원 정도 모자랐다. 나는 주말에 부모님 댁에 들러 밥을 먹으며 엄마에게 참새처럼 수다를 떨었다.     


  “보증금으로 너무 통장 잔액을 다 닦아 쓰긴 좀 그런데…. 전세 대출을 하든지, 뭐.”    

 

  내가 가볍게 얘기하자 내 얘기를 듣던 엄마의 눈이 희번덕 하더니 나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니는 돈 안 모아두고 뭐 했는데?” 

  “뭐?”     


  머릿속이 하얘졌다. 불과 얼마 전에 내가 취직해서 벌어놓은 돈 대부분을 이 신도시에 들어올 부모님의 아파트에 보탰었다. 엄마는 언젠간 갚아준다고 큰 소리였고 아빠는 이 돈은 못 받아 갈 거라며 껄껄 웃었었다. 악착같이 모으고 살던 내게는 항상 받아 가고, 돈을 펑펑 쓰고 사는 남동생에게는 지원을 해주는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엄마 말로는 내가 더 모았어야 한단다. 그녀는 방으로 피신하는 나를 뒤 따라오며 나의 씀씀이가 얼마나 헤픈지 쏟아냈다. 방에서 이불을 감고 있던 나의 호흡이 가빠졌다. 엄마는 방문 밖에서 대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네가 은행의 무서움을 모른다고 따발총처럼 쏘아대다가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사라졌다. 한 시간쯤 뒤 나는 가랑비를 맞으며 갓 짜여 자기들끼리도 어색한 보도블록 위를 넋이 나간 채 걸었다. 그때 전화로 내 정신없는 얘기를 듣고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 A였다. 다행히 나는 그녀에게 빌리지 않고 다음 달 월급을 거의 다 들이부어 대출 없이 보증금을 낼 수 있었다. 이후 엄마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내가 월급을 더 받는 줄 알았단다. A의 선선한 대답은 나를 다시 집으로 들어올 힘을 줬다.     


  얼마 전 들은 심리학 수업에서 가난에 관해 얘기했다. 가난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굶음 때문이 아니다. 텅 빈 통장은 인지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근시안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미국의 <Give directly>라는 자선단체가 케냐에 ‘현금’을 지원한 사례를 들었다. 까다롭지 않은 조건으로 많은 가정에 큰 금액을 지원했다. 그러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감소했고 건설적 의사결정을 하게 되었다. 현금이 도박, 투기에 쓰이면 어쩌나 염려했지만 대부분 자영업이나 지붕 교체 등 장기적 투자에 쓰였다.    


  진주에는 육십 년 된, 아주 약이 잘 듣는 데다가 저렴하기까지 한 한약방이 있다. 그 한약방에는 간절하고 선한 사람이 빈손으로 갔다 하면 현금 봉투를 쥐고 나온다고 한다. 한약방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청년이었을 때부터, 처음 한약방을 하던 스무살 때부터 팔십이 된 지금까지 한결같았다고 한다. 육십 년간 그 돈이 얼마나 멀리, 많이 퍼져나갔는지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어림잡아 백억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왜 모르냐면, 그 백발의 눈만 또록또록 새까만 할아버지가, 해방도 되기 전인 옛날 옛적 44년도에 태어난 그 경상도 할아버지가 입이 참 무겁단다. 또 돈을 주면서 차용증 한번 안 받았다고 한다. 현금은 공부하고 싶어 하는 진주 학생들 밥값이 되고 책값이 되고, 심지어 대학원생이 되어서도 학비를 말하면 생활비만큼 얹어서 도와주니 없는 살림에 공부만 열심히 해서 교수된 사람만 여럿이고, 또 진주에서 시작했다는, 형평운동이라는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을 앞장서서 알리고, 일제 강점기 때 반민족적인 짓을 했던 사람들 명단을 작성하고, 남편한테 죽도록 맞고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위한 집을 짓고, 지역 신문사의 적자를 메우고, 지역 극단의 연습실을 마련하고, 또 손님이 안 끊기는 한약방에 고생하는 직원들한테도 월급을 엄청나게 주고, 그래 놓고 본인 자식들 결혼식에는 축의금도 안 받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고등학교를 멋지게 지어서 운영하다가 자리를 잡으니 국가에 헌납했다고 한다. 그게 사십 대 때 일이란다. 또 2004년도에, 그 21세기에 호주제 폐지하는데 유림 할아버지들이 모여갖고 반대하고 이럴 때도 한약방 할아버지는 직접 나서서 길에서 사인도 받았단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팔십이 되도록 차도 없단다. 보통 이렇게 살았으면 중간에 출마를 한번 해야 정상 아닌가 하는데, ‘내가 낸데.’하고 자기 업적을 A4 10장으로 추려서 줄줄 읊으면서 동네방네 확성기 달고 트럭 타고 다니면서 기호 몇 번 해도 안 이상한데, 그런 일도 없고 대통령이 보자고 해도 거절했단다. 팔십이 되도록 똑같이 살았단다.     


  늘 자신을 내세우길 싫어해 진주 밖으로는 덜 알려진 그를 세상에 내어놓은 사람은 퇴직 기자 김주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가진 자에 대한 반감으로 기득권자의 악행을 보도하는 것에 힘써왔다. 그러다 좋은 사람을 널리 알리는 것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길임을 느껴 허락도 없이 무례하고도 저돌적인 취재가 시작되었다. 전국에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들을 찾으러 다녔다. 취재 과정은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작년 겨울, 나는 코로나 시국에 힘겹게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동창 A는 이모가 남자를 만나라고 채근해 ‘기분이 나빠져’ 결혼식에 못 오겠다며 카카오톡으로 축의금을 보냈다. 친구 중에 결혼식장에서 가장 가까이 살았던 그녀의 예상치 못한 불참에 나는 몹시 불쾌했다. 나는 결혼 일주년이 되도록 그녀를 나만의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속으로만 미워했다. 그러다 ‘어른 김장하’를 보게 되었고 진주의 한약방 할아버지를 보다가 그녀가 나를 ‘살려낸’ 순간을 떠올렸다.     


  죽음 직전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을 인터뷰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인생수업>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어른 김장하는 한약방을 처음 열던 스무 살 때부터, 여명에 다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깨우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진주 사람들이 마음껏 드나드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그의 조건 없는 지원, give directly는 60년간 진주의 많은 가정이 근시안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막았을 것이다. 100억이 없어도 우리는 친구와 이웃의 긴급한 순간을 도울 수 있다. 그의 한약방이 열려있었듯, 당신의 마음을, 전화기를 활짝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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