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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as Oct 27. 2024

가을의 기도(2)

가을의 기도(2) 241027

나의 모래시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불가 몇 년 전 앞으로 월급을 몇 번이나 더 받을 수 있을까 세어 보았다. 그 숫자가 가물거리지만 대략 128번이었던 것 같다. 지금 세어보니 27회 남았다. 이것도 어찌 될지 모른다. 그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불가 몇 분 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우리들 세상에서 지나친 욕심이다. 



어느 유명인은 방송 촬영 직전에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해 보았더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더란다. 머니저가 집으로 가 보니 주방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며칠은 그 이야기가 안주거리에 휴식 중 주접거리가 되었다. 심근경색이니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 어쩌다 그리 되셨나 하는 안타까움들을 영혼 없이 주절 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애도하는 것인지 웃음만 나왔다. 그렇다고 함부로 속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다. 사람의 죽음 앞에 웃는다는 것, 그를 슬퍼하는 사람을 희화화하는 것은 일반적인 정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픔 없이 생을 달리하는 것. 일하다 가는 것. 예기치 않은 그분의 초청? 부름에 즐거이 가는 것. 



부럽다. 물론 남은 사람들, 무언가 그와 약속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움, 피해도 줄 수 있지만 한번 더 들에다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노년의 죽음, 한국인의 평균적인 죽음 과정을 정리해 보면, 대략 50대에 은퇴를 하고 60대까지 비정규직 일을 하다가 그 후 10년을 이리저리 허송세월, 또는 비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취미니 여가니 하며 다가올 죽음을 걱정하며 지나온 추억을 회상하며 또 10년을 보낸다.


그리고 약 10년을 아프다가 가는 것이다. 그게 80대이다. 



한 때 9988234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다가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생물학적 삶의 관점에서는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시각으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처해진 현실이 제각각이니 함부로 제단 할 수 없다. 그렇게 죽고 싶다는데 뭐라 할 것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그 많게만 보이던 월급 받을 숫자는 두 자리 수가 된 지 오래이다. 이제 곧 한 자리 숫자가 멀지 많았다.


 주변에 온통 생물학적 인생과 연명, 누구가 권위에 업혀 던져진 말에서 벗어나야 한다. 벌써 가을이다. 낙엽이 뒹굴대며 갈지자로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자주 들린다. 내 삶도 여름은 지난 지 오래다. 아무리 저항하고 거부해도 안 되는 것이다. 순응한다. 



원하지 않은 삶의 시작, 언제 끝날지 모를 삶의 끝. 인생 관성의 법칙을 깨야할 때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한 기운을 내 삶의 흔적으로 잠시만이라도 조금이나마 남기고 싶다. 



노년도 아닌데 욕심이 줄어들지 않으니 마치 먹을수록 커지는 블랙홀 같은 심보다. 그냥 인도하시는 대로 걸어나 가야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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