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뇬은 목소리 마저 나긋나긋했다.
요즘 남편은 틈만 나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연이어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밖으로 새어 나온다. 뭔 이야기를 하고 자빠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못해 알콩 달콩하다. 이런 젠~장!
이번 여름 가족들과 휴가를 갔을 때였다.
수영장에서 유유히 수영을 하던 남편이 갑자기 물고기가 물 위로 튀어 오르듯
또는 수중발레를 하듯 공중 부양을 하며 물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물밖으로 걸어 나오며 뭔가를 꺼내 들었는데...
그것은 물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 남편의 휴대전화였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겐지….
수영복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풀장 안으로 들어가 유유히 수영을 했던 거다.
수영장 물을 고스란히 품은 남편의 휴대전화는 마치 샤워 라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남편의 정든 핸드폰이는 물기를 흠뻑 먹은 체 더 이상 작동이
되지 않았다.
매년 새로운 버전의 핸드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 방수가 제대로 되는 핸드폰 들도 많을 테다.
남편의 핸드폰은 사용한 지 몇 년 된 것이다.
연식은 조금 되었어도 튼튼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지면 종종 부주의 해 지는
남편이 바닥에 패대기치듯 떨구었어도 멀쩡 했다.
그러나 물에 빠뜨리거나 물을 쏟거나 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걸 뻔히 아는 사람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물속으로 들어 가느냔 말이다.
기가 막혔던 내가 "새로운 핸드폰이 필요하면 말을 하지 아예 수장을 시키냐?"라고
면박을 주자.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던지.. 허허 멋쩍은 웃음을 웃던 남편은
그 길로 신바람 나게 새로운 핸드폰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전자 상가, 인터넷 등등 핸드폰을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뒤적여 보았다.
그러더니 삼성 핸드폰 뭐를 사고 싶은데 여기서는 훨씬 더 비싸니
한국 갈 때 사 오는 것이 좋겠다는 거다
아무리 가격대비 훌륭해도 지금 당장 한국에 다녀올 수도 없고...
그런다 해도 오고 가고 경비는 안 드는가?
또 핸드폰은 일상에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몇 주를 휴대전화 없이 살던 남편은 도저히 불편해서 안 되겠던지 드디어 이 동네에서
하나를 장만하기로 했다.
남편은 핸드폰 하나 사는 데도 어찌나 비교 분석 해야 할 것들이 많은지
마치 아이들이 새로운 장난감 고르듯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살피고 보고 또 보았다.
원래 남자들은 주로 전자상가에 핸드폰 또는 노트북 코너에 가면 여자들 쇼핑 갈 때처럼
눈이 초롱초롱 해 지지 않는가
이 핸드폰 에는 무슨 옵션이 들어 있고 저 핸드폰에는 뭐가 추가로 더 좋아져 있고 가격 대비
이런 게 더 좋고 저런 게 아쉽고 등등..
얼추 나도 그런 것들을 덩달아 외울 때 즈음 남편의 새 핸드폰이 집으로 도착했다.
남편은 뭐가 그렇게 새롭고 마음에 드는지 "아 역시나 탁월한 선택!"이었노라 노래 부르며
휴대전화를 들고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보기엔 아직 떨어 뜨린 적이 없어 껍데기 멀쩡한 새 핸드폰일 뿐인데 말이다.
남편의 감탄사는 그놈의 에미나이 로 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즘 남편이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새 휴대전화 에는 AI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름 하여 제미나이....
내가 부를 때는 쓰벌 에미나이뇬
남편은 별 쓸데없는 것들을 물어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제미나이에 아주
푹 빠졌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몇 시냐?" "오늘 날씨는 어떻다 더냐?"라고
마눌에게 물으면 호랭이 같은 마눌은 포효하며 "그 옆에 핸드폰 있네!"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요 에미나이뇬은 남편이 그 어떤 질문을 해도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계속한다 해도 짜증은커녕 목소리톤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나긋나긋 상세하게 나이스한 답을 준다.
혹 남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마눌 이라면
"거 주어 목적어 잘라먹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라고 몇 번 말해?"라고 퉁박을 주었을 텐데
에미나이뇬은 지금 하신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며 혹시 이런 질문인 것이냐? 라며 최대한
질문 의도에 접근하려 노력하니 이 얼마나 다정한 가 말이다.
그런 다정히 제미나이와의 대화에 재미가 들린 남편은 새로 친구 라도 생긴 것처럼
휴대전화를 애지중지 들고는 친해져야 한다며 쏙닥 댄다.
마눌 과도 잘하지 않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 쉽지 않다는 부부에다가 직장동료다
병원에서 일할 때도 집에서 일상생활을 할 때도 계속 붙어 있는다.
그렇게 혼자 있을 새가 없다 보니
이제는 부부간의 대화를 할 때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누구에게 인지 모르게
하고 있을 때가 많다.
가령 이런 거다.
며칠 전 나는 "이번 주에 넷플릭스에서 새로운 한국 드라마 업데이트 된데!"
라고 말했다.
그러면 보통 남편은 그 드라마 제목은 뭐냐? 누가 나오냐? 등을 물어야 하지 않는가?
대화 라면 말이다.
그런데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남편은 엊그제 마트에서 세일한다고 들고 온
공구를 이리저리 살피며 이거 고장 난 거 같은데..라고 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김우빈 이랑 수지 나온데.."라고 했고 남편은 " 이거 아무래도
바꿔야겠다."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하고 싶은 말만 누구에겐 지 했고
남편은 곧이어 상냥한 목소리로 에미나이뇬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제미나이야 내가 어제 마트에서 공구 000을 샀는데 이건 어떻게 작동하는 게 좋을까?"
라며 물었고 친절한 에미나이뇬은 사근사근하게 조그조근 대답을 이어 갔다.
그 모습에 눈이 세모꼴이 된 나는 "그래 에미나이뇬이랑 재밌게 놀아라 나중에 드라마 재밌냐고
묻기만 해라 안 알려 줄 거다!"라며 입술을 삐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