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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도영 Dec 27. 2016

#29 기리데이를 즐기자고!

Guiri time, Guiri day


Guiri - [구어] 외국 관광객, 스페인어 사전.



 이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보려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행을 할지도 모르는데 세세하게 계획을 미리 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상에서조차 매일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여행을 떠나서 계획대로 다닌다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해도 여행의 묘미를 놓치는지도 모른다. 그저 큼직큼직한 계획을 세울 뿐이다.. 

 

 큼직한 계획 중 하나가 내겐, 유럽에서 스페인, 남미에서 브라질. 두 나라만큼은 한 달 정도는 여행을 하자. 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스페인으로 왔다. 5월의 스페인은 특유의 따뜻한 날씨와 웃음이 멈추지 않는 사람들로 날 반겨주었다. 바르셀로나로 들어가서 하루만 있고, 제일 남쪽, 타리파로 떠났고, 45일간 스페인 곳곳을 여행했다.



스페인의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 그 중에서도 세비야. 타리파에서 처음 만난 흑인 친구가 자기 도시도 여행오라고 반겨주었기에 갈 수 있었다. Nigga 니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부르면 흑인을 비하하는 말이지만, 친한 이들끼리는 애칭처럼 니가, 니그로라고 편하게 부른다. 그가 성격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도영, 너도 내 친구니까 니그로라고 불러도 돼!'



 니그로,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음을 열고 날 받아주었다. 이들과 같이 세비야를 돌아다녔다. 세비야는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한 건축양식들이 많다. 도시 자체로 특이하면서도 예쁘다. 그래서였을까?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와, 여기 진짜 사람 많다! 건물들도 다 이쁘고!'

'아! 근데 저 사람들 대부분 '기리 Guiri'야'

'기리?'

'응! 기리! 영어로 뭐라 하지? 무튼 기리 있잖아!'



 상황을 지켜보니, 여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나도 기리네? 나 기리야 기리! 요 소이 기리 Yo soy guiri'

'하하하하핳'

 

 함께 있던 친구들 모두, 내 말을 듣더니 빵 터졌다. 서로를 치며 난리가 났다. 스페인 애들이 참 웃음이 많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크게 웃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도영, 넌 기리가 아니야. 넌 우리 친구자나. 로컬이랑 어울리잖아. 기리는 저기 몰려다니면서 사진 찍고 그런 사람들이지! 저렇게 둘러보다 가버릴 거야.'

'그니까 나 기리야! 대신에 좋은 기리 할래! Good guiri.'

'얘들아. 나 여기 있는 동안 기리 데이 할까? 기리 타임도 갖고!!'

'무슨 말이야?'

'세비야에 사는 너네를 기리로 만들겠어 내가!!'



 위풍당당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스페인 사람이 기리를 말할 때는 사실 마냥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관광객.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시끄럽고 불편한 존재를 뜻하기도 했다. 물론, 난 단순한 관광객은 아니다. 난 여행하면서 그 나라 사람들 분위기에 동화되려 한다. 그 시간만큼은 그들이 되고 싶었다. 이 도시 친구들은 어디에서 밥을 먹는지, 어떤 밥을 먹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밤에는 어디를 가는지,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공유하는 게 내겐 중요했다. 그러나, 그 도시를 둘러보는 관광 역시 중요하지 않나? 그 또한 여행의 일부이다.

 

'치카 치코스! 얘들아! 여기 좋다! 자 기리 타임!!'

 내가 기리 타임을 외치면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것 마냥 행동했다. 처음엔 다들 얘가 뭐 하는 거지? 라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이 순간을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도영! 기리타~~임!!!'

'저기 가서 기리 타임 갖자!'

'야야야, 저쪽도 좋아 보이는데?'

'니그로, 너 빨리 안 오냐!!'


 하루를 마치고, 한 친구네 집에 모여서 장난을 치는 것도 즐거웠다. 노래를 틀어놓고, 서로 웃고 떠들며 놀리며 하루가 저물어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 기리데이 하루도 벌써 끝났어!' 

'진짜 재밌었어! 내일도 기리데이 하자! 기리데이!'

'우리 아직 못 간 곳이 너무 많다. 낼 아침엔 내가 엄청 좋아하는 아침 먹는 곳에 같이 가자! 그걸로 또 하루 기리데이를 시작하는 거다! 다들 빠질 생각하지마'

 

 스페인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제 누가 기리 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처럼 기리가 되어갔고, 내 안에 그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스며들어왔다. 다음날 아침부터 또 한 번의 행복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엔, 시에스타(낮잠)을 가졌다. 다들 뻗었다. 스페인 남쪽은 한낮에 너무 덥다. 특히 여름엔 해가 너무 뜨거워서 밖을 돌아다닐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시에스타. 이들과 옆에 줄줄이 누워 시에스타를 즐겼다. 시에스타가 끝나고, 우리는 또 다시 기리타임을 갖기 위해 돌아다녔다. 하루, 또 하루 기리타임으로 채운 내 핸드폰 앨범은 그들과의 사진으로 가득 차고 또 찼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헤어져야 하는 날이 왔다. 이들과 지낸 시간이 너무 즐거웠기에 헤어지기 너무 아쉬웠다.

 

'도영! 넌 최고의 기리야! 보고싶을거야'

'난 벌써부터 그립다'

'너 진짜 다시 여기 와야해! 너가 무슨 기리냐 스페인인이라고 하고다녀!'

'하하하. 나도 너네가 진짜 너무나 보고싶을거야. 절대 잊지않아. 연락 자주 하자! 알겠지?'



 아모벤스(amovens, 블라블라 카와 같은 카풀 서비스) 를 부르고, 차 주인이 올때까지 함께 기다려준 그들. 차 주인이 오니 그에게 5~6명이 한꺼번에 달려가 주인에게 날 잘 부탁한다며 이야기하는 그들. 차 주인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들 덕분에 난 안심하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행에 답은 없다. 관광객 역시 훌륭한 여행의 답 중 하나다. 내겐 관광 그 이상으로 그 도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그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함께 즐겨보는 것. 그들을 알아가는 것이 즐거운 여행일 뿐이다. 여행지가 단순히 여행지가 아니라, 현지 친구들과 연결이 되었을 때, 그곳이 어디건 최고의 여행지가 되고 만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우쳤다.

 

 나는 여행가 같은 멋진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어설프니까, 세계를 여행했어도 여전히 초보니까. 여행에 능숙한 사람이 되기엔 너무 허점이 많으니까.

 

다만, 난 행복한 기리였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기리. 난 기리여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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