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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Nov 21. 2023

영웅이에게로 뻗은 미로


엄마가 임영웅, 을 우리 영웅이, 라고 부르기 시작한 뒤로, 나는 임영웅 콘서트 예매일마다 여러 신들에게 나의 지난 선행들을 어필하며 ―제가 안암역에서 지갑 찾아준 거 보셨죠. 이번에 예매 실패하면 진짜 저 가만히 안 있습니다. 당신 안 믿어버릴 거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됐다. 엄마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영웅이의 콘서트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해낼 뿐만 아니라, 시계도 읽을 줄 모르는 채로 태어난 두 명의 인간을 무사히 성인으로 키워낼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임영웅 콘서트 티켓을 구하는 일에 대해선 어쩐지 바위 포켓몬 앞의 피카츄처럼 무력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임영웅 콘서트의 매표소로 이어진 길,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티켓 구입 절차를 완료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길은, 뭐 딱히 주의를 기울일 것도 없는 쉬운 코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친절한 이정표가 곳곳에 위치해 있으며, 바닥은 모난 곳 없이 잘 정비되어 있다. 남들보다 매표소 앞에 먼저 서내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명확한 목적지가 라벨링 되어 있는 하이퍼링크들을 타고 구매처에 도착해, 절차에 따라 매표 과정을 밟아내는 일 자체는 별도의 약도나 안내문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어린 시절부터 PC 그리고 스마트폰과 부대끼며 축적된 직관에 의해, 오래된 습관처럼 물 흐르듯 진행된다. 거칠게 말해, 그런 것쯤은 키스를 나누면서도 가능하다. 내가 그런 식으로 예매를 한다는 건 아니지만(당연하다).


그러나 보는 위치에 따라 그림이 바뀌는 홀로그램 스티커처럼, 엄마 쪽에서 바라본 그 길은 내 쪽에서 보이는 것과는 영 딴판인 모양이다. 그동안 엄마가 도움을 요청해 온 문제들을 바탕으로 그 길의 모습을 그려보자면(그리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친절하기는커녕 해독이 필요한 이정표들은 그마저도 꽁꽁 숨어 당최 눈에 띄지가 않고, 흉악한 하이퍼링크 무리는 아리송한 이름표를 붙인 채 엄마를 영 엉뚱한 곳으로 보내버릴 기회만을 엿보고 있으며, 어렵사리 진행해나가던 인증이나 결제 과정은 마치 태양 흑점 폭발로 인한 통신 장애처럼 뭔가 불가사의한 이유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과연 이 코너를 돌았을 때 무엇이 나타날지 감이 잘 오지 않는, 흡사 미로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그 미로 속에서 엄마가 홀로 무력해져버리게 둘 순 없는 일이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의 발전에 의해, 어떤 종류의 일들을 과거의 방식으로 묶어두던 한계들이 하나둘 극복되어가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일들을 처리하는 새로운 방식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한 옵션, 내지는 가능한 방법, 정도의 이름이 붙여진 채 한쪽 구석 자리에 놓인다. 예컨대, 나는 어렸을 때 뉴스에서 인터넷으로 피자를 주문할 수 있는 사이트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음식을 주문한다는 게 뉴스에 나올 정도로 특별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여러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적절히 맞물리면서, 과거 이렇게나 특별한 방식으로 피자를 주문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라는 식으로 소개되던 것들이, 어느새 그 분야에서 상당한 지분을 갖게 되거나 그 일을 처리하는 당연하고 주된 방법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배달앱으로 음식을 주문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은행 업무를 보는 건 이젠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고, 임영웅 콘서트 티켓 예매 같은 경우 인터넷상의 예매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휠체어석을 제외하면) 없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변했겠지만, 아무튼 일상의 레벨에서도 그런 식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엄마의 일상엔 앞서 소개했던 미로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웬일로 햄버거가 먹고 싶다며 퇴근길에 하나 사 와야겠다던 엄마는, 미로 같은 키오스크와 자꾸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라고 응대하는 직원 사이를 헤매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몇 분 전까지 나와 말다툼을 하고 전화를 끊었던 엄마가, 회사에서 컴퓨터로 연말 정산 자료를 내려받아 이메일로 제출하라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며 먼저 전화를 걸어온다(엄마는 컴퓨터를 못 한다). 티비 보는 게 취미인 엄마가, 검색하다 보니 나왔다는 정체불명의 다시 보기 사이트에서 몇 분 단위로 출몰하는 광고들을 꺼대며(그 과정에서 때때로 다른 사이트로 납치당해가며) 힘겹게 영상을 본다. 음.. 이거야 속상한 일들이다.


그 속상함은 단순히 엄마가 일상에서 종종 미로를 마주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엄마가 도장 깨기마냥 일상의 모든 미로를 풀어낼 필요도 없고, 많은 경우 미로와 함께 그 일을 처리하는 다른 방식이 병존하며, 일상의 레벨에서 마주하는 미로가 그녀에게 영영 미로로 남을 수밖에 없을 난이도인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미로를 만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것에 대한 풀이법을 손에 넣기 전까지 모든 것은 일종의 미로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읽어내는 일이라든가, 컴퓨터로 연말 정산 자료를 정리하는 일, 오늘부터 우리 집에 살게 된 강아지의 아리송한 몸짓을 이해하는 일 등은, 최초의 조우에서 분명 미지의 무엇이었다. 


그렇게 미로를 마주한 각자는 누군가에게 배워서든, 갖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든, 그동안 쌓인 직관을 통해서든 (필요하다면) 그것을 풀어내는 작업에 돌입한다. 두 갈래 길 중 한쪽을 폐쇄하고,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위치를 표시해두며, 곳곳에 이정표를 세운다. 누군가는 미로를 조우함과 동시에 그 작업을 완료해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된다. 많은 노력에도 네이티브의 능숙함을 따라잡을 수 없기도 하다. 


내 속상함은 그 더딤에 대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엄마가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들. 그리고 그것에 가로막혀 그녀가 원했던 걸 조용히 포기하는 일들. 물론 엄마가 매번 하는 말처럼 엄마에게는 도움을 요청할 아들과 딸이 있다. 실제로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그녀의 미로를 자주 뛰어넘는다. 매년 엄마의 연말 정산 자료를 정리해 담당자에게 발송하고, 엄마 폰에 다양한 OTT 앱들을 설치해둔 채 구독료를 내고, 엄마가 핸드폰을 바꾸는 날에 맞춰 본가에 내려가 삼성페이 등록이라든가 각종 설정을 마무리해놓고 돌아온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미로를 없는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 하지만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해볼 사람을 지닌 것과 언제든지 자신의 차를 몰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낼 수 있는 건, 분명 스스로에게 다른 실감을 갖게 한다.


표를 사기 위해서는 매표소로 가야 했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당신 앞에 서야 했던 더없이 단순했던 그 시절.


앞서 말한 종류의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읽었던 저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은 정말 지금보다 덜 복잡했을까. 나는 그렇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단순해 보이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지목될 수 있겠지만, 이런 건 어떨까. 누군가 어떤 문제의 풀이법을 단단히 쥐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좀 더 단순해 보이게 되지 않을까. 백종원 아저씨가 각종 문제적인 식당에 대한 솔루션을 뚝딱뚝딱 말해내듯이.


엄마의 더없이 단순했던 시절, 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녀가 자신의 일상에 걸쳐 있는 것들을 손쉽게 이해해낼 수 있었던 시절.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녀의 세상이 좀 더 선명했을 시절. 그러니까, 그녀의 일상에 미로가 들어설 자리 따윈 없었던 시절. 


당시에도 세상은 나름의 방식으로 바쁘게 최신화되어갔겠지만, 그녀는 각종 크고 작은 변화들을 별다른 노력 없이도 따라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전엔 없던 새로운 무엇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새로운 방식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채, 그것에 더딘 그녀의 엄마 아빠가 미로 속을 헤매는 일에 속상해하기도 하고, 종종 그들의 손을 잡고 미로를 뛰어넘기도 했을 테다. 실제로 내가 꼬맹이였던 시절, 나의 흐릿한 세계에 가득 차 있던 미로를 앞장서 걷어내주고, 나 스스로 미로를 풀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준 척척박사가, 바로 당신이었다.


이대로 오래오래 살아간다면, 내 일상에도 미로들이 들어서고 그것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어린 조카들은 너무도 능숙하게 다루는 것들을, 그들이 내게 몇 번이나 가르쳐줘도 당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날이. 웬일로 들어선 햄버거 가게에서 뇌파로 주문을 받는 기계를 만나게 된다면 꽤 당황스럽겠지? 뇌파로 주문을 하라고? 난 그냥 통새우와퍼주니어가 먹고 싶어서 왔을 뿐이라고. 이 빌어먹을 기계로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아무튼 간에, 지난주, 엄마는 우리 영웅이의 콘서트를 보러 동생과 함께 서울에 왔다. 콘서트가 끝나고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영상 속엔, 하늘색 옷을 챙겨 입은 엄마가 무대 위의 영웅이를 보며 너무나 행복해하고 있었다. 만약 나와 동생이 없었다면, 엄마는 영웅이에게로의 여정을 조용히 포기해버렸을까? 음.. 그거야 확신할 순 없는 일이지만,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건 확실히 참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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