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속, 을 봤다.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1997년 작이다.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서 꽤 오래전에 봤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 아예 초면이었다. 나는 대체 뭘 가물가물해했던 걸까. 이런 일도 다 있다.
나온 지 25년쯤 된 작품이니만큼 영화 속 풍경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에는 다소 비일상적인 것들이 포함된 채로 꾸려지던 당시의 일상들과, 한때 현역이었으나 이제는 수명을 다해버린 당시의 당연함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몇 가지 소개해보자면, 한석규와 전도연이 pc통신으로 대화를 나눈다든가, 카페 한켠에 고객용 공중전화와 메모지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다든가(어떤 메모들이 붙어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차들에 썬팅이 되어 있지 않아(옅게 되어 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차량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든가, 사무실 복도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운다든가 하는 모습들.
그런 것들 중, 직장 상사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한석규와 동료 작가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했다. 너무 신선해서 바다에 풀어주면 곧바로 대서양을 향해 어푸어푸 헤엄쳐갈 것만 같았다고 한다면.. 역시 과장이겠지만, 음주운전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접하는 건 처음이라 꽤나 놀랐다.
한석규가 작가에게 묻는다. 운전할 수 있겠어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작가가 답한다. 괜찮아요. 타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이거야 묻는 쪽이나 답하는 쪽이나 음주운전 따위는 전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뉘앙스의 대화였다. 그러니까 지금 한석규는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고.. 작가는 본인이 음주 상태로 운전할 차에 타라는 말을 무려 호의로 건네는 거고..
이후 한석규와 헤어진 작가는 정말로 운전대를 잡는다. 하지만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대형 트럭과 충돌한다든가, 음주 단속을 피하려 경찰차와 카체이싱을 벌이다 차가 전복된다든가 하는 교훈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장면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크린에 걸렸고(뭐 걸려면 못 걸 것도 없겠지만) 그 해 최고 흥행작이 되어 상들도 여럿 받았다. 이 정도면 당시에 이게 무슨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거야, 라는 논란은 딱히 없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1997년의 한국은, 음주운전이야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세계였던 것이다. 예전에는 음주운전이 꽤 흔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그때도 어쨌든 불법이었으니 하더라도 좀 몰래몰래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뭐야 정말 다른 세계였잖아, 라는 실감이었다.
다른 세계. 그러고 보면 하나의 세계, 라는 것은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당연함에 의해 세워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법이든, 사회의 암묵적인 끄덕임이든, 개인의 독자적인 당위든, 또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이 그 당연함을 기반해 세워지고, 판단하고, 행동할 테니까. 예컨대 18세기 프랑스, 라는 세계에선 평범한 가족이 시체 관람소로 나들이를 떠나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산업혁명 시대, 라는 세계에선 꼬맹이들이 일을 나가 돈을 벌어왔다. 인간은 보통 그래도 되는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선 그래도 됐다. 음.. 역시 다른 세계다.
군대, 라는 세계는 군대만의 당연함을 기반으로, 기독교, 라는 세계는 기독교만의 당연함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어떤 세계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 라는 세계에도, 90년대의 한국, 이라는 세계에도, 또 4학년 7반, 영업3팀, 우리집 개, 그리고 온전한 개인, 이라는 세계에도 각 세계만의 당연함이 존재한다. 군대, 라는 세계에서는 부대장이 제초 작업을 지시하면 합당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도 그냥 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 집 개, 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인간에게 다가가면 그 인간이 배를 긁어주는 게 당연하다. 내가 아는 지인, 의 세계에서는 테이크아웃 컵을 길바닥에 버려두고 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마치 영원할 것만 같은 각 세계의 당연함들도 여러 원인들에 의해 그 유효성을 곧잘 상실해버리고 만다. 평소 음주운전을 일삼던 아버지는 자기 딸이 음주운전 차에 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당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다가가 사내 새끼가 술 먹고 운전 좀 할 수 있지, 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낼 수 있을까? 송곳, 의 대사처럼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또한 서로 다른 당연함을 가진 각각의 세계는 숨을 쉬듯 만나(충돌해) 서로의 당연함을 재정립하여 새로운 세계(관계)를 만들어낸다. 각자의 당연함을 조금씩 양보하여 합의에 이르거나, 한쪽의 세계가 다른 한쪽의 세계를 찍어 누르며 자신의 당연함을 강제하거나, 재정립에 대한 합의가 불발되어 결국 파국으로 치닿는 등의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렇게 철수와 영희의 세계, 개인과 군대의 세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세계 등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서로 다른 세계들은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결국 자신이라는 세계가 기반하고 있는 당연함까지 갈아치운다. 말하자면,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되어가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음주운전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고, 영희와 사귀고 싶은 철수는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쓰레기통을 찾아 한참을 헤매게 되고, 나는 몇 년 전 직접 올려둔 페이스북 게시물들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게 된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농담들과, 부끄러움에 완독할 수조차 없는 생각들. 뭘 그렇게 많이 올려놨는지 전부 지우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 그리고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참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현재의 내가 가진 당연함들은 어디까지 유효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나의 당연함이었던 것들을 언제까지 세상에 발맞추어 갈아치워낼 수 있을까. 혹시 나 또한 나의 당연함이자 지금 세상엔 틀린 것이 되어버린 것들을 놓지 못하고선 세상의 비난을 받으며 살게 되진 않을까. 이거야 머리가 복잡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