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오전 7시 정도였는데 첨벙거리는 소리에 하나 둘 가족들이 깼다. 장인어른과 처남도 합류해 수영장에서 첨벙거리다가 느지막이 밥을 먹으러 갔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식당이 있다고 해서 걸어갔는데, 너무 더웠다. 도착한 식당은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곳이었다. 비싼 곳일 것 같아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더워서 그냥 들어갔다. 비싼 곳은 맞았으나 실내 식당이 아니어서 더운 건 그대로였다. 그래도 시원한 커피와 음료를 좀 시키고 그늘에 앉아 있으니 조금씩 시원해졌다. 어제에 이어 먹은 밥은 입맛에 맞았다. 여섯이 먹은 밥은 10만원 언저리가 나왔는데, 처남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치고는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향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는데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다. 이렇게 시원할 수 있는데 왜 더운 데에서 밥을 먹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나마도 가만히 그늘에 앉아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건 이 날 하루 중 시원한 축에 속하는 시간이었다. 에어컨을 켠 차 안이나 숙소 안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습하고 더운 공기를 피할 길은 없었다. 심지어 이 날은 해가 내리쬐는 우붓 시장을 걸었다. 여기서 배운 말은 ‘마할’이었는데, 비싸다는 뜻이다. 나는 뭘 살 생각도 별로 없었지만 상인들의 “원 달러, 원 달러” 호객 소리에 “마할, 마할”을 외치고 다녔다. 정작 당신이 뭘 사려고 할 땐 나는 큰 도움은 되지 않는데, 언어가 통하는 처남이 나섰다. 야외 시장을 돌아다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동대문 시장이 떠오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이긴 하지만 기둥만 있고 문이나 창문은 고사하고 벽도 없어서 비만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비는 금방 그쳤다. 당신이 어딘가에 정신을 빼앗긴 동안 나는 에어컨이 나오는 편의점에서 서성이다가, 딱히 뭘 사진 않고 온갖 한국 컵라면들을 구경하다, 카페에 앉아서 라떼를 시키고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라떼에 빠져 있다. 내 라떼 철학에 따르면, 커피의 향과 우유의 지방이 만났을 때 나오는 고소함이 어떠한가에 따라 라떼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래서 발리 우붓의 길거리 카페의 라떼 맛은 어땠냐면, 평소 먹던 커피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캐나다의 커피에서도, 한국의 커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떤 향이 있었다. 바디감이니 산미 같은 건 모르겠지만 발리의 라떼는 특별한 향이 있었다. 몸의 열을 좀 식히고는 얼음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로밍을 하지 않아서 내 핸드폰은 시계와 카메라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는데도, 일행과 떨어져서 혼자 이국 땅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건 우붓의 시장 동선이 크게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원 달러”와 “마할”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디선가 가방을 구매한 가영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리 풍의 가방을 보여주며 예쁘지 않냐고 자랑스럽게 물어보는 가영이에게 나는 예쁘다는 맞장구와 함께 얼마냐고 물어봤다. 만원 언저리였나. 처남이 흥정을 도와줬다나. 언제나 가격에 따라 만족도는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기 마련이다.
만족스러운 쇼핑도 했겠다, 밥을 먹으러 간다. “아얌 베뚜뚜”였던가, 닭고기를 볶은 어떤 요리였다. “아얌”은 닭이라는 뜻인데, 베뚜뚜는 뭔지 모르겠다. 우리가 먹은 게 베뚜뚜가 맞는지도 사실은 가물가물하다. “사유르 라와르”였나 어쨌든 땅콩과 버무려진 매운 소스와 섞어서 먹은 닭고기 요리는 맛있었다. 생각해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실패한 음식점은 없었다. 대체로 입맛이 비슷한 건지 처남이 알아서 좋은 곳으로 데려가준 건지는, 다음에 처남 없이 우리끼리 여행을 가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맛있게 먹고 차에 타는데, 옆에 트럭에 살아있는 닭들이 트럭 위 닭장에 있었다. 트럭 기사는 산 닭들을 식당에 여남은 마리씩 옮기며 배달해주고 있었다. 식당에서 도축도 즉석에서 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정육식당 정도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정육식당도 살아있는 소를 데려오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맛있게 먹어놓고 해골물을 탓하면 무엇하겠나.
식사를 마치고는 발 마사지를 받기 위해 처남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본다. 대가족이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마사지 샵은 잘 없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 복잡한 우붓 시내 마사지 샵 앞에 낑겨 주차를 했다. 마사지사들은 전문가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오래 걸어 쌓인 피로를 풀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