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선생 Apr 19. 2018

차갑거나 뜨겁거나.

#013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 기관 등에서 받은 모든 서류 등을 모아둔 파일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삼 남매의 상장, 입학 증서, 성적표 등 기억될 만한 자료들을 큰 서류철에 모아 두셨다가 결혼할 때 넘겨주셨다. 아주 가끔 그걸 펼쳐보는데 거기엔 뜬금없는 상장이 두 개 있다.

<작가가 받은 상장1>
<작가가 받은 상장2>

"높이뛰기 3등"

"멀리뛰기 2등"


 1등도 아닌 저 상을 받고 나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육상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손자가 아침부터 운동장을 돌고 있다는 소식에 할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셨던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며칠을 고민하신 후 할아버지께서는 학교로 찾아오셨고 나는 그날부로 육상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운동으로 성공할 만큼 강골은 아니었고, 아침부터 뜀박질하는 게 나 역시 재없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몸을 써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 볼 수 있었던 건 꽤 괜찮은 기회였던 것 같다.


몸으로 익힌 것.


 각설하고, 운동으로 돌아가 보자. 야구가 재미있어서, 축구가 좋아서, 이 승엽 선수처럼 되고 싶어서 (또는 그냥 공부가 하기 싫어서)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면 부모는 좀 황당할 것이다. 세워놨던 뒷바라지 계획이 뒤틀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 동안 손 놓았던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모는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이가 하지 않겠다는데. 그렇게 결정했을 때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을 테니, 걱정하기보다는 본인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한 그 대견함에 오히려 뿌듯해하면 좋겠다.

Case1) 이종사촌 여동생이 있다. 고1 때 우슈를 그만뒀다. 이유는 우슈 선수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해서 법대와 로스쿨을 졸업하고 지금은 외국의 한 로펌에 근무하고 있다.

Case2) 한 아이는 지금 중3인데, 배구부가 있는 중학교를 찾아서 들어갔지만 지금은 공부로 돌아섰다.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상위권(2등급, 상위 11% 이내) 수준은 된다.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한다. 점점 더 좋아질 것 같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까지 운동선수였다가 공부를 시작해서 예상밖의 결과(예를 들면, 변호사, 회계사 등의 직업을 갖게 되는 것)를 이뤄내는 이야기는 매스컴에 가끔 소개된다. 우리나라는 "운동선수 = 공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많다. 더구나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로를 180도 전향하여 좋은 성과를 이루어 내는 사례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운동선수들이 전향해서 성공하는 것이 꼭 놀라운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열심히"의 의미는 확실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연습해야 배운 것이 자신의 실력이 되는지를. 타고난 신체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0.1% 노력이 부족해서 운동에서 크게 성공할 수 없었을지는 몰라도 분명 최선은 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로를 바꿔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욕

 

 요즘 부모들을 보면 초등학생도 고등학생처럼 많은 시간을 공부해 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퇴근한 부모는 아이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기를 원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독서라도 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게 다 TV탓이다. 열심히 뛰어놀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들은 나오지 않고 공부와 관련된 영재들만 나오거나, 혹은 정반대로 게임에 빠져있거나 부모와 사이가 나빠서 문제 있어 보이는 아이들만 나온다. 그러니 자신의 아이에게서도 나이에 맞는 모보다 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생의 살인적인 일과표, 출처:파이낸셜 타임즈>


 부모들이 기대하는 아이의 모습이 어린 시절 자신들의 모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TV에서나 나올만한 아이들의 모습은 소수에 불과하므로 내 아이가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말자. TV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 전자오락실도 다녔지만 지금 다들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차갑던가 뜨겁건가

 

 아이들이 노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반드시 놀아야 한다. 진짜 문제는 신나게 놀지 못하는 것이다. 신나게 놀고, 열심히 공부하면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초등학생 때 익혀야 할 태도이다. 그러려면 무엇이 되었든 열심히 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꼭 공부일 필요는 없다. 노는 것은 본능에 가깝고, 공부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 처음으로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 공부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열심히 해 본 경험. 그것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한다면 아이에게 필요해 보이는 것이 좋을까 아이가 원하는 것이 좋을까. 교육 관련 카페에 뭘 시켜야 할지를 물어보는 글이 많은 것을 보면 필요해 보이는 것을 시키려 하는 부모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열심히 해 본 경험"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시키는 것이 사실 더 바람직하다. 필요한데 싫어하는 것보다 덜 필요한 것 같아도 좋아하는 것이면 열심히 하게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클 테니까. 물론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경우가 많으니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된다. 그 '조금'이 큰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


 초등학생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학생처럼 긴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책상에 대충 앉아서 엄마 눈치 보며 버티다가 놀면 눈치가 보여 신나게 놀지도 못한다. 그러고 나면 또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하게 되는 것이다. 논 것도 아니고 공부한 것도 아니다. 그냥 미적지근한 상태.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상에 앉는 시간은 무조건 늘어난다 하지만 집중력은 다른 이야기다. 그러니 양보다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태도가 먼저 길러져야 하는 것이다.


 학습과 비교해서 놀이나 운동을 통해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신체적 활동을 통해서 국, 영, 수에서는 배울 수 없는 너무 값진 것들을 아이들은 즐기면서 체득할 수 있다. 태권도도 영어로 배우고, 놀이도 영어로 하는 것이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수 도 있다. 하지만, 학습이 침범함으로 인해서 놀이나 신체활동의 참맛이 조금이라도 희생된다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회식자리에서 업무 지시하면 그건 제대로 된 회식인가.  


 뜨겁게 놀고, 차갑게 공부하면 된다.




[구독, 공유, 라이킷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선행학습이 실력이 아닌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