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지내는 친정 엄마를 두고 우리만 제주에 내려가 살기가 못내 마음에 걸려서 몇 달의 설득 끝에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독립적인 성격의 엄마는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홀로 편히 지내다가 갑자기 딸도 모자라 사위와 함께 산다는 결정이 선뜻 내려지지 않았을 텐데, 종종 노후에 강원도에 내려가 살면 어떨까 말을 꺼냈던 참이라 귀촌 예행연습을 제주도에서 하기로 정했다.
9,20
엄마가 자전거 타기를 연습한다길래 마을 입구로 갔다. 몇 년 전에 엄마는 분명히 자전거를 탔는데 그 세 잊어버렸다. 어설프게 몇 번을 멈춰 서다 감을 잡았는지 살살 길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길래 이모와 엄마를 두고 나는 먼저 집 안으로 들아왔다. 한 시간도 안돼 이모와 들어오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엄마가 넘어져서 입이 퉁퉁 붓고 팔이며 다리가 다 까졌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어린애처럼 하하- 웃으면서 들어서는 것이었다.
2,19
엄마한테 어지럼증이 생겨서 걱정이다.
병원에서는 노환 증상이라고 하는데 엄마는 계속 힘들어하고 어린아이처럼 굴어서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걱정이 많이 된다. 우리는 짐짓 씩씩한데 엄마는 하루 사이에 수척하다.
그냥 좀 더 엄마가 씩씩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는 엄마는 너무 늙은 걸까.
내가 아줌마가 되어가는 사이에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아줌마도 할머니도 거스를 수 없는 노릇이니 아프지나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제주 생활”도 일상이 되어가면서 가끔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생기고, 이곳도 서울처럼 미세먼지가 잔뜩 낀 날도 있지만,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건강만은 시골 생활의 소박한 바람대로 되었으면.
3,30
엄마와 이비인후과에 다녀오려는데 양할머니와 동네 할머니께서 오일장에 가신대서 모셔다 드렸다.
우리는 시장에서 칼을 갈고 토마토와 작은 양은 밥상과 상추 씨앗을 샀고 할머니들은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셨다. 그러면서 고등어는 노르웨이산 고등어가 맛있고 제주산은 맛이 없다고 하셔서 우리도 따라서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샀다. 비료를 많이 주면 상추가 죽으니까 비 온 뒤에 씨앗을 심고 비료를 조금씩만 주라고도 일러주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어제 여섯 시 내 고향에서 본 돌산 갓김치가 먹고 싶어 혼나셨단다. 할머니 두 분의 대화가 귀여워서 엄마와 나도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우리가 마늘을 조금씩 마트에서 사 먹는다니 양할머니는 댁에 도착해서 냉동실에 얼려둔 마을을 잔뜩 싸주셨다. 뒤늦게 엄마가 옆 동네에 집을 사고 이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고 알려드렸더니 엄마 손을 꼭 잡고 좋아하셨다.
걱정하지 말라며, 땅이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주자주 놀러 오겠다고 하셨다.
서울에 돌아오기 전에 엄마와 둘이 여미지 식물원에 다녀왔다. 그때 사진을 꺼내 보다가 무심히 엄마를 그려본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흐릿해지나 보다.
옅은 엄마의 얼굴이 희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하게 화장을 하고 강렬한 빨간색을 사게 되고 진달래색 옷을 맞춘 듯 입는 걸까. 엄마 얼굴에서 머리가 하얀 고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엄마가 비쳐서 서글프다. 함께 내려갔다가 엄마만 두고 올라와서 못내 신경이 쓰여 자주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살피고, 한 달 만에 엄마만 보고 왔는데 엄마의 얼굴이 밝아서 다행이다.
그래, 엄마는 씩씩한 사람이었지. 조용조용 부끄러움 많은 성격으로 혼자 두 남매를 키워낸 사람인데.
제주 시골에서는 엄마는 할머니 축에도 못 끼는 ‘젊은 서울 아줌마’니까 할머니들 틈에서 귀여움 받으면서 세월을 잊고,
명랑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다.
특별한 엄마의 동치미는 그곳에서 더 맛있게 익어갈 테니 엄마를 보러, 동치미를 먹으러 제주에 내려갈 일이 늘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