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독서인권] 기고
장애인들이 펴낸 수기에는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한낮에 독서에 천착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형제자매는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 그들은 문학 전집이나 백과사전을 통째로 읽는 일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2021년보다 훨씬 장벽이 많던 과거 장애가 있는 아이는 정규교과과정을 배우거나 집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 책은 새로운 세계와 지식을 향한 창문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책이 과거부터 장애인에게 특별히 친절한 매체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는 아닌 것 같다.
나도 수기형식의 첫 책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성장기에 관해 털어놓았다. 독서가로서의 면모는 적을 것이 없어서 “책을 좋아했던 어머니 덕분에 몇 권의 책을 읽은 것이 내 지식의 전부였다”고 썼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다. 90년대 후반까지 나는 보행이 불가능한 장애 덕분에 교육과정에서 소외된 채 집안에서만 지냈고, 그동안 정말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집에는 세계문학을 축약해 편성한 문학선집이 있었고 어린이 과학 만화 시리즈가 있었다. 『우주는 왜?』를 여러 번 읽었고 200쪽 정도로 줄인 『플란다스의 개』 『삼국지』 『그리스 신화』 정도를 완독한 기억이 있다. 『컴퓨터 길라잡이』 역시 흥미진진한 독서였다. 10대 중반이 되자 어머니가 톨스토이의 『부활』과 이광수의 『흙』을 사주었는데, 꾸역꾸역 읽었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기억하는 독서 경험의 거의 전부다. 대부분의 시간을 TV나 16비트 게임기, 작은 공을 가지고 놀며 보냈다.
뒤늦게 공교육과정에 진입한 후에야 이상, 염상섭, 이효석 등 한국 근현대문학을 (수험을 목적으로) 접했고, 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수업을 계기로 서양의 철학자들, 사회과학자들의 책을 읽는 것은 어렵지만 흥미진진했고, 고전이라 불리지만 어린 시절 읽지 않은 문학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005년 여름방학 충격적인 독서 경험이었다. 최인훈의 『회색인』과 『화두』는 20대 내 정체성 일부를 뒤흔들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 모두 읽었을 법한 책들을 뒤늦게 따라갔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었거나 조금은 들춰보았을 책 가운데 여전히 읽지 않은 것이 많아서 지금도 읽는 중이다. 지난달부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는다. 펼치지 않은 『안나 카레니나』가 머리맡에 놓여 있다.
방대한 주제 의식을 품은 고전을 읽는 일도 좋지만, 여전히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이 책보다 더 즐겁고 편하다. 최신 영상 콘텐츠보다 철저한 프랑스식 귀족 문화 안에서 성장한 나타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러시아 민중의 오래된 춤을 온몸으로 보이는 『전쟁과 평화』의 유명한 장면 앞에서, 내 몸과 마음 깊은 곳의 어떤 찌릿함이나 경이로움이 솟구친다. 그러나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어떤 외로움이나 공허함에 직면한 날에 나는 16비트 게임기를 켜듯 넷플릭스에 접속하지 톨스토이를 읽지는 않는다. 내게 문자의 세계는 어린 시절부터 헤엄쳐온 삶의 일부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지적으로 기른 후천적 습관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길고 지루한 사막 같은 시간을 보내던 10대에 왜 나는 책의 세계에 빠지지 못했을까? 삶을 회상하는 글에서 자신의 독서 경험을 털어놓은 장애인들은, 그 시절 장애를 가진 대다수가 공교육에서 소외된 가운데서도 어떤 개인적인 이유에서 깊은 독서 경험을 했고, 바로 그렇기에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일 것이다. 아마 더 많은 장애인은 집에 문학 전집이 없었거나, 장애로 인해 문자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웠거나, 책을 읽는데 필요한 주의력과 언어능력을 기르는데 요구되는 적절한 자극이 부재한 채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성장기 세상에서 소외된 채 혼자 집을 지키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나처럼) 책보다는 TV나 컴퓨터 게임 따위에 빠지기가 더 쉬운 것이 아닐까?
책은 교육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 편리하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의 창이 아니라 교육과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아야 비로소 지루함을 덜 느끼며 주의를 집중해 빠져드는 매체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주변 사물의 모양과 기능, 등하굣길 거리의 풍경, 사회를 구성하는 복잡한 제도와 문화적 의례들, 여러 친구나 동료와의 관계를 통과하며 강렬하고 다차원적으로 경험하는 정서를 얼마간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19세기 페테르부르크의 소설가가 쓴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까? 아이들을 위해 쓰인 이야기라도 아이들의 세상을 제대로 겪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절절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의 이야기와 정보를 전달해주는 창문으로서 책은 그다지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만(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책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하는 세계를 언어라는 상징체계 속에서 증폭하거나 단순화하는 기묘한 역량을 기르며, 이로써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장애라는 경험이 소외되면 그것이 기존의 언어를 통해 증폭되거나 변주되며 탄생시켰을 새롭고 풍요로운 언어는 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에서 소외된 장애인을 위해 책이 특별히 중요하다기보다는, 책의 세계를 위해 장애라는 경험이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글 : 김원영(작가, 변호사 /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