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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Aug 18. 2016

영어로의 이민

Immigrating into English 번역

시인 Ocean Vuong이 New York Times에 기고한 글을 감히 제맘대로 번역해보았습니다.


읽기와 쓰기는, 여느 다른 기술처럼 천천히, 한 조각씩 습득된다. 하지만 나는 벼농사를 짓던 집안 출신의 ESL(미국 학교에서 영어가 부진한 학생들을 위해 조성된 반) 학생이었고, 내 가족은 읽는 행위를 배운 척하는 것으로 보았다. 심지어, "괴물들이 사는 나라 (Where the Wild Things Are)"같은 간단한 책을 공부하는 것마저 마치 가라앉는 늪 위에 서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은 멀찍이 둘러 모여 의심의 눈초리로 팔을 꼬은 채, 내가 가라앉는 걸 지켜본다. 


내 가족은 내가 두 살이었던 1990년에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 전부 합해 일곱 명이었던 우리 가족은,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 시의 방 한 칸 딸린 아파트에 살았으며, 나는 미국에서의 첫 5년을 베트남어에 둘러 쌓여, 파묻혀 지냈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보면, 다시 이민을 하는 느낌이었고, 이번엔 영어로의 이민이었다. 여느 미국 아이처럼, 나는 그 유명한 멜로디 (지금도 "M"이 "N"보다 먼저인걸 까먹을 때 혼잣말로 재빠르게 부르는 그 노래) 덕분에  ABC를 금세 터득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나는 영어가 능숙해졌다. - 하지만 말하기만 제법 할 뿐 글쓰기는 영 아니었다. 


어느 이른 봄날 오후, 내가 4학년이었을 때, 문예 시간에 과제를 하나 받았다: '시를 읽는 달 National Poetry Month'를 기념해 2주 안에 시를 한편 쓰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글을 잘 못쓰기 때문에 이런 과제를 하는 대신, 교실 뒤쪽에 앉아 수업 내내 파란 플라스틱 통에서 고른 책의 내용을 하염없이 베끼고 있을 것이다. 이 과제는 일종의 위장이었다; 어떻게든 똑똑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내 창피함과 실패를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은 내가 위험하리만큼 대담한 마음을 먹고나서부터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시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디 있니?" 선생님이 물었다. 그는 교실 형광등에 내 시를 비추어 들고 위조지폐를 검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천천히 밝아오는 방을 보며, 눈이 오기 시작한 걸 알았다. 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 매달려있는 내 작품을 가리켰다. "아니, 네가 베낀 시는 어디 있지? 네가 어떻게 이런 걸 쓸 수가 있겠니?" 그러면서 그는 내 책상을 내쪽으로 밀쳤다. 책상 아래에는 수납함이 달려있었고 나는 거기서 물품들이 쏟아지는 걸 지켜보았다: 직사각형의 핑크색 지우개, 크래용, 노란 연필, 빼곡히 글씨로 채워진 구겨진 학습지들, 라임 맛 막대사탕 하나. 하지만 시는 없었다. 나는 내 발밑의 파편들 위에 섰다. 바깥에는 작은 얼음 결정들이 창문에 모여들었고, 우리 반의 소년과 소녀들은, 빈 종잇장 마냥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몇 주 전, 나는 도서관을 다녔었다. 그곳은 점심시간 동안의 내 안식처였다. 그러지 않으면 내 부드러운 목소리와 왜소한 체구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나를 "계집애, " "게이"라고 놀리면서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내 반바지를 발목까지 끌어내리기도 했다. 나는 테이프 플레이어 옆 바닥에 앉았다. 카세트가 가득한 상자에서 나는 "위대한 미국의 연설들"이라고 적힌 걸 집었다. 내가 그걸 고른 건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마이크 단상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고른 건 성조기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문양이었기 때문이다.


헤드셋을 통해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와 내 몸을 채웠다. 그 남자의 어조는 바다의 파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장들 사이는 관중의 - 나는 수천 명을 떠올렸다 - 환호성과 손뼉으로 채워졌다. 나는 수많은 머리가 끝없이 출렁이며 뒤섞인 장면을 상상했다. 그의 목소리는 달의 기운을 가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내 조그마한 삶으로는. 사회자는 그를 '닥터 마틴 루터 킹 주니어'라고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닥터(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쩌면 여기 사람들은 모두 아픈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치료하려는 것이다. 그의 말속에는 약이 담겨있는 게 분명해 - 말속에 약이 담길 수 있을까? "나는 꿈이 있습니다, " 나는 그 의사의 이야기를 입으로 벙긋였다. 마침 떠오른 게, 나는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들도 입으로 벙긋이곤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들려주신 이야기들. 물론, 읽을 수 없다는 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는 게 아니다. 


내 시의 제목은 "만약 아이가 꿈을 꿀 수 있다면."이었다. "약속된 땅, " "산 꼭대기"같은 표현들이 내게 와 닿았고, 나는 봄날의 황혼 같은 풍성한 황톳빛으로 빛나는 평야를 보았다. 나는 그 의사가 봄을 떠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래서 내 시는 봄에게 바치는 헌정시 같은 것이었다. 내 할머니가 보시던 정원 가꾸기 프로그램에서 나는 실제로도 보지 못한 꽃들의 이름을 외웠다: 디기탈리스, 라일락, 나리꽃, 미나리아재비. "만약 아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금빛 평야를, 라일락으로, 튤립으로, 금잔화로 가득한..."


나는 "만약" 그리고 "아이"같은 단어는 알았지만, 나머지는 찾아봐야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단어들을 소리 내어보며, 무릎 위에 사전을 올려놓고, 단어를 검색했다. 며칠 뒤, 회색빛 흑연로 쓰인 시가 나타났다. 종이가 백기라면, 나는 항복한 것이었고, 시를 쓴 것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한다. 나는 명백한 열등생이었다. "어디 있니?" 그는 되물었다.


"바로 여기 있어요, " 나는 말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집힌 내 시를 가리키며.


나는 책이 아닌 책을 읽었었고, 눈이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 그것을 읽어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읽기"를 통해, 나는 나의 세상을 종이에 담아냈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문예의 영역에서 거짓말쟁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작가였다. 나는 내 인생을 표절함으로써 나의 진실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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