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우 Jun 16. 2017

디자인의 본질은 보는 것

디자인 싱킹 Design Thinking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유행에서 현대 비즈니스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 디자인, 산업 디자인, 건축 등등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트렌드는 현존하는 분야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자본이 디자인 싱킹에 편중된 현 상황은 많은 디자이너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시각적인 작업물 Product에서 하나의 사고 과정 Process을 표방하는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한 친구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마구잡이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 아마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단어 디자인 Design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Disegno에서 온다고 배웠는데, 이는 그리기를 의미한다. 대학 시절의 드로잉 교수님은 이 디세뇨라는 단어는 단순히 그림을 그려내는 손기술보다는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여,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렬의 사고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 수업에서 귀 아프게 들었던 내용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물체를 당연히 있는 그대로 그리지 뭘 어떻게 더 있는 그대로 그리라는 것인가? 그 교수님은 우리가 제출한 그림들을 끊임없이 틀렸다고 지적하고 다시 그리게 했다. 한 반학기가 지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우린 어떤 대상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그 대상보다는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그 대상의 이미지에 의지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꽃을 그리라고 했을 때,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꽃의 부분 부분을 관찰해서 그린다기보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꽃'의 모양을 떠올리고, 그 생각에 의지해서 그림을 그린다. 못 믿겠다면 주변 사람에게 컵 하나를 보여주고 그 컵을 그리라고 해보자. 대부분, 컵쯤이야 하면서, 눈으로 한번 흘겨본 뒤, 종이를 응시한 채 컵을 쓰윽 그려낼 것이다. 분명 컵은 눈 앞에 있지만, 시선은 컵보다는 종이에 더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컵 정도는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디세뇨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시험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시각적 사고 과정이었 던 것이다. 그 학기가 끝난 후 우리는 세상을 보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디자인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Look와 See의 차이다. 의식적으로 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은 반짝이는 영감으로부터 대단한 것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과정이라는 선입견이 잇는데 이만큼 틀린 이야기도 없다. 물론 비범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정말 특이한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어디서 본 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는 것이다. 천재라고 칭송받는 가우디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복잡한 자연 형태에서 기하학적인 구조를 도출해내고 여러 시각적 테마들을 구성해서 가우디만의 유기적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자연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콘셉트들을 단순화시키고 도출하는 과정이었고 결국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은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본질을 도출해내는 안목이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통해 소의 본질을 그려내려 했다


"새로운 볼펜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한 인터뷰에서 JOH&Co를 이끌고 있는 조수용씨가 던진 질문이다. JOH&Co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들은 매거진 B를 만드는 출판사이고, 일호식, 세컨드 키친을 운영하는 사업체이며, 스테이 호텔 등을 디자인하는 브랜딩 회사이다. 조수용씨의 질문에서 그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영역을 웅화시키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본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는 이전에 없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시중에 나와있는 모든 제품을 살펴봐야 한다고 한다. 현존하는 모든 볼펜을 조사하고 연구했을 때, 그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볼펜 디자인의 대한 수만 가지 디자인 결정을 분석할 수 있고 그 내용을 종합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볼펜의 본질,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가우디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것처럼, JOH&Co는 존재하는 제품에 대한 레퍼런스를 구축하고 영감을 얻는다. 방대한 레퍼런스를 가지면 어떠한 제품에 대해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있는 기준이 생기고, 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를 수 있다. 한마디로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많이 봐야 한다. 이처럼 보는 과정 Process를 습득한 JOH&Co는 이 시대가 원하는 유연한 디자이너의 좋은 예이다.  


이렇게 방대한 레퍼런스에 의존한 디자인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회사인 OMA를 이끌고 있는 렘 콜하스 Rem Koolhaas는 건축을 공부하기 이전에 영화와 저널리즘 쪽에서 일하였는데, OMA의 작업 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OMA의 디자인 과정은 어찌 보면 단순 무식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콘셉트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OMA는 모델 만들기에 크게 의존한다. 모델 하나를 만드는 게 정성을 들이기보다 대충대충,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기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10명의 팀원이 2시간 동안 각각 5개의 모델을 만든다고 하면, 그들은 2시간에 50개의 콘셉트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OMA는 강한 직관과 생산력에 의존한다. 50개의 콘셉트 중 괜찮은 아이디어 5가지 정도가 나온다면 그 다섯 개를 토대로 좀 더 발전된 모델을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어떤 모델에서는 특정 부분만 반영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다시 이전에 만든 모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일례로 Casa da Musica의 기본 형태는 이전에 Y2K House를 위해 만든 모델에서 도출해냈다. 



렘 콜하스는 우리 친숙한 냅킨에 슥슥 디자인 스케치를 해내는 천재 건축가의 모습보다는 총괄 편집자 Editor in Chief에 가까워 보인다. 건축보다는 잡지를 만드는 과정이나,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그의 능력은 펜 놀림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글도 여러 편 썼다) 여러 요소들을 종합해 볼 수 있는 거시적 시각과 그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안목에서 온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이 미적 감각이나 기술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을 이끌 욕심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본인이 가장 뛰어난 미적 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디자이너들을 이끌 안목, 그리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렘 콜하스는 가장 뛰어난 디자이너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 


디자이너로서 '공부'를 한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렇게 레퍼런스를 모으는 게 아닌가 싶다. 안목을 기르기 위한 방법은 분별력을 기르는 것인데, 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많이 보고 그 차이를 스스로 깨닫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많이 듣는 조언이 여행을 많이 하고,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다니라는 것인데 결국엔 자신만의 레퍼런스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가 만들어질 즈음,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다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