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하는 별 것 아닌 힘든 일
임신 9개월에 접어들었지만 막상 대단한 준비는 별로 못한 것 같은데, 성격 상 중간과정에 유난을 잔뜩 떨어놓고 막판에 진이 빠져 "될대로 되겠지, 운명이 이끌 것이야" 하는 모드가 이번에도 작동한 탓이다. 배가 제법 나오고 체중도 잔뜩 불어 밤 마다 쉬익쉬익 거친 숨을 몰아쉬며 뱃 속 아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내가 먹을 당이 먼저 땡기고, 탄산이 간절하다. 한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며 필요한 유난은 이미 죄다 떨었는데, 그도 그럴게
- 임신 후기에 접어들기 전, 17시간 비행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한 회사 휴직 일정이 빨리 결정 되어야 했고 (너무 초조했다)
- 2020년 12월, 한국과 뉴욕의 코로나 상황은 예측 할 수 없이 둘 다 너무 심각했으며 (너무 불안했다)
- 남편과 완전히 기러기부부로 임신 기간을 지낸 탓에 심신도 지쳐있었고 (너무 피곤했다)
무엇보다 경이롭고 신기하게 만난 아기인지라 임신 초중기에 매일 같이 태아의 상태를 걱정하고 염려하는데 온갖 기력을 쏟아부은 나머지 미국에 잘 도착해 현지 자가격리 일정을 마친 이제는 마음이 완전 뻗어버린 상태라고 할까.
그 와중에 인천공항에서 32kg 캐리어 두개 + 기내 캐리어 한 개 + 백팩에 크로스백까지 짐은 또 얼마나 악바리 마냥 바득바득 챙겨왔는가. 아기 가재손수건, 천기저귀, 세탁망, 지퍼락, 신생아 면봉, 내복, 코뻥, 튼살크림, 발진크림, 젖병솔, 젖병건조대, 체온계, 습도계, 초점책, 애착인형 등 (도넛방석까지 챙겼다가 막판에 뺐다) 세상 자잘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70키로를 넘어가는 내 캐리어 3종 세트를 친정아빠는 아주 어이없게 바라보며 세계 최고 강대국으로 가는 애가 맞냐고 누가 보면 소말리아에 가는 줄 알겠다며 혀를 찼고 이 개그진 말은 미국에 다시 들어와 현지 병원에 가보고서야 내가 정말 세계 최강대국의 병원에 와있는게 맞는지 혹시 정말 소말리아에 온 건 아닌지 다시금 떠올랐다.
한국에서 분당 한 여성병원에 다녔던 나는 임신 28주까지 약 10번의 초음파를 봤는데, 첫 임신이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횟수였다고 생각한다. 6주에 아기집을 확인 한 후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갔고 12주 뒤론 4주엔 한 번씩, 중간에 이런저런 문의가 생겨 들릴 때 또 초음파 한 번씩, 출국 앞두고 진료기록 떼러 간 김에 초음파 한 번... 그랬더니 10번은 금방 채워지던데? 뉴욕에 도착해 2주간 현지 자가격리 일정을 소화하며 동네 병원에 전화해 내 임신주수와 한국에서의 진료기록을 말해주자 (초음파 진료 횟수 6번이라고 나름 줄여 말했는데...) 병원 담당자는 기절초풍을 했다. "너 하이리스크 산모니?" "정말 다른 문제는 없니?" 암만 아니라고 해도 몇 번이나 되묻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곳 산모들은 출산할 때 까지 평균 3번의 초음파를 본단다. 미국 병원에선 28주 산모가 고국에서 10번 넘는 초음파를 이미 보고 미국으로 건너왔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환자는 아닌가 싶어 재차 확인을 요했고 "우리나라는 보통 이 정도 해. 나 노멀한 임산부야...“ 머쓱한 답변을 여러 번 한 끝에야 우려를 불식 시키고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처음 가본 미국 산부인과 첫인상도 황당했다. 세계 최고 강대국 병원이 한국 동네 병원에 비해 뭐가 이렇게 간단하던가? 몸무게는 추를 이동시켜 쟤고, 아기 크기는 배에 줄자를 대고 쟤고, 혈압도 의사가 손에 공기주머니를 쥐고 직접 푸쉬푸쉬 해서 측정했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오차 범위가 적은 것은 알겠다만 임신 초중기를 한국 병원에서 다니며 이미 각종 디지털에 익숙해진 나에겐 너무나 새삼스런 현장이었다. 재밌는 건 먹고 있는 영양제의 성분과 복용량에 대해선 또 괴앵-장히 꼼꼼히 체크한다는 것. 임신 9개월 쯤 되면 한국에서 철분, 오메가3, 비타민D 정도 섭취하길래 대략 유명 맘카페에서 엄마들이 많이 찾는 브랜드를 체크해 복용 중이었는데 여기선 내가 먹는 영양제의 비타민 함유량, 복용방법 및 주기를 아주 성의있게 물어보고 꼼꼼히 코멘트를 주었다. 한국처럼 단일민족이 아니고 워낙 다양한 인종과 체형을 가진 환자가 많아서 그런가? 의사는 한참을 복용 중인 약에 대해 확인했고, 스스로 어떤 성분이 어느정도 포함된 무슨 약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어 좀 화끈거리던 순간이었다.
근데 또 초음파는 당최 뭘 찍어준 것인지? 사진을 받아들곤 황당 그 자체였다. 클리니션은 분명 "아기 얼굴이 귀엽다" 며 사진을 뽑아줬는데 내 눈엔 새까만 배경에 정체불명 흰 추상조각만 둥둥 떠다닐 뿐. 저기.. 뭘 찍어주신거죠? 한국에서 3D 입체초음파로 끝내주게 귀엽고 선명한 화질의 사진을 찍고 왔는데, 그로부터 4주가 더 지난 시점에 찍은 이 초음파 사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집에 붙여두고 싶었는데 아무리 요리보고 저리봐도 나로선 도통 해석이 불가능한 사진이라 곱게 접어 봉투에 모셔놓았다.
오늘 임신 후기 정기검진을 마치고 왔는데 혹시 역아는 아닌지? 뱃속의 아기가 너무 빨리 커버린 건 아닌지 아기 몸무게 정보를 좀 얻고 싶었다만 (이 곳에 와 아이스크림, 빵, 잼, 과일을 달고 살고 있어 아기가 너무 클까봐 매일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퍼먹고 있다) 의사는 그런 질문이 새삼스럽다는 듯 "나중에 가면 다 알 수 있어" 한 마디로 모든 궁금증을 불식시켰다. 한국에선 이 주수에 꼭 측정한다는 아기 크기. 그게 정말 과잉진료인 것인가. 유난인가 싶어 더 물어보지 못했다.
집에는 아기침대와 매트리스 등 몇가지 가구 준비를 마쳤고 이 것 외에는 이제 도저히 뭘 더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연분만을 하게 되면 출산 후 하루 만에 집으로 보낸다는데, 여기서 산후조리원을 갈 수도 없는 운명이니 유튜브로 틈틈이 공부하고 블로그로 정보도 좀 얻고 해야 하는데 배가 불러 올 수록 모든 게 귀찮고 할딱할딱 불어버린 몸으로 마음만 바쁜 채 몸은 누워서 핸드폰만 깔딱거리는 요즘이다. 아기 샴푸나 바디워시 각종 세제도 영어로 성분을 확인 하는데 지쳤고 유축기와 수유패드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왜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는데 설명서는 뭐가 그렇게 자세하게 영어로 블라블라인지 이걸 100% 해석 못하고 평소 내 성격처럼 막무가내로 '일단 써봐' 도 되는 건지, 한국 면이 좋다는데 미처 못챙겨온 것들은 대강 오가닉코튼이라 써진 걸 고르면 되는 건지, 비판텐이니 리도멕스니 하는 각종 크림 연고들도 언제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 볼 사람도 없고 알아야 할 기력도 쉬이 나진 않지만!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무럭무럭 잘 커주는 아주 고마운 아기를 생각하며 힘을 내보려 한다.
뭐든 닥치면 하게 된다고 못할 게 또 뭐 있을까.
타국에서 출산하는 유난은 오늘,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