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기에는 외박에 가까웠던, 조촐한 1박 일정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
발단은 몇 달 전 독서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파주 출판단지의 한 숙소를 알게 된 것이었다. 도서관이 있는 숙소였다. 쉬러 가는 여행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예약을 하려고 보니, 가장 작은 방이 싱글베드 2개가 있는 트윈룸이었다. 게다가 주말은 다 차 있어서, 가장 빠른 예약가능일이 11월 중순이었다.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가고, 아니면 혼자 다녀올 요량으로 선뜻 예약부터 했다. 겨울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책 읽으며 쉬는 곳이라면 어차피 거의 그 안에만 머무를 성싶었다.
체크인 날짜가 임박했을 때에야 아주 소극적으로 몇몇 친구들에게만 같이 가겠느냐 물어보았고, 아무도 되는 사람이 없었다. 감사히 2인실을 독차지했다.
여행 당일,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 우선 지하철로 합정역까지 간 다음, 파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버스정류장 인근 길바닥에는 보도블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노란 은행잎이 빼곡히 깔려 있었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추위에 움츠러들어 있었다. 버스는 한강을 따라 곧게 뻗은 길을 하염없이 달려서 파주 시내로 들어섰다.
사실 특별한 재미는 없었다고 해도 좋을만한 하루였다. 정말로 숙소에만 틀어박혀서 파주 시내는 돌아다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읽지도 않았다. 처음 몇 시간은 노트북으로 글을 좀 썼다. 저녁을 먹은 뒤로는 넓은 서가를 둘러보다가, 불륜의 이유에 대해 논하는 책을 뜬금없이 30분이나 읽었다. 그다음에는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골라서 방으로 빌려 왔는데, 다 못 읽고 일찍 잤다.
책의 내용보다는 그날 두 도시를 오가며 받았던 인상이 남들에게 더 쉽게 얘기할만한 소재였다. 합정은 사람으로 붐볐고, 특히 젊은 사람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옷을 개성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관뚜껑 열고 돌아온 듯 너덜너덜하게 삭은 고스룩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팀 버튼이 좋아할 거 같았다. 이게 바로 서울인가 싶었다. 나도 매일 서울로 출퇴근하는데. 반면에 파주 출판단지는 주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적했고, 고요했고, 건물과 건물들 사이에 여백이 넉넉했고, 그 사이에서 바람은 부는지 시간은 흐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번뇌도 재미도 없을까 하는 상상이 절로 들었다.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재미는 없을지언정, 번뇌까지 없는 일터는 없을 것이다.
다시 휴식 얘기로 돌아가서 그날 뭘 했나 생각해 보면, 평상시 집에서도 하는 일을 파주까지 가서 한 것에 불과했다. 사 먹은 것들도 단출한 베트남식 해물볶음밥, 제육백반, 감자칩과 캔맥주다. 체크인 전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노트북을 펼치고 예전에 쓰던 글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객실에 들어가고 나서도 노을이 들 때까지 계속 이런저런 글을 끄적거리며 논 것이다.
창밖 풍경은 멀리 시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트여 있었다.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거리를 두고 서있어서, 그 사이로 시선이 훠이훠이 날아갈 수 있었다. 빽빽한 도시의 아파트와 빌라에서는 귀한 풍경이었다. 이런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집을 얼마나 동경했던가.
객실에 나뿐이고,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도 말을 걸거나 보채지 않아서 좋았지만, 그렇게 쉬기 위해서 먼 도시까지 찾아와야 했는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은 밖이 아니고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나만의 공간을 가져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여행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갈 거다. 평온한 휴식은 집에서, 즐거운 추억은 밖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