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쟁이 써니 Jun 25. 2021

소멸로 향하는 예술 장르들을 애도하며

-0%를 항하여(2021 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했다.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니 수록 작품들은 너나할  없이 신선한 소재와 빛나는 문장들과 완성도 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중에서 유독  소설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소설이 소멸을 향해가는, 예술 장르를 너무나도 아스라하게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목에 등장하는 0% 소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조금씩 희미해지다가 소멸을 향해 가는 예술의 하위 분류  하나인 독립 영화를 의미한다고.


 비단 독립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많은 예술들이 번성하다가 사라졌다. 바로 떠오르는 것 중에 판소리가 있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 온 백성에게 사랑받는 국민 예술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명맥을 잇는 정도이다. 시조도 생각난다. 고려 말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중기 이후에는 기녀들까지 작가로 등장하다가 후기에는 중인, 백성들까지 시조를 창작했다. 가히 국민 예술이다. 그러나 역시 지금은 명맥만 잇고 있다. 그 다음은 무엇이 될까?           

1. '독립 영화' 대신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

 바로 떠오르는 것은 시였다. 20세기 내내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화려한 장르. 교과서에 실린 기라성 같은 시인들. 김소월, 백석, 윤동주, 조지훈, 박목월, 김수영, 신경림, 기형도, 정호승...너무 많아서 다 나열할 수도 없는 그 빛나는 이름들. 국어 시간, 문학 교과서와 모의고사 문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러나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고 국어 교사가 된 나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시를 읽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점에서 구입한 시집은 도종환 시인과 유하 시인의 시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1세기 시인들의 시들은 이전 세기의 작품들만큼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서점에서 살 만큼 끌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는 난해해졌고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라는 장르는 점점 하향 곡선을 그으며 침잠하는 느낌이다. 서점에서 시 코너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밀려났고 그마저도 영상 매체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매스컴을 타는 몇몇 인기 시인의 시집이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시가 수록된 시집이 장악하고 있다.

 시뿐일까. 소설은 어떤가. 이 소설에 나오는 '독립 영화' 대신에 '시' 나 '소설' 이 들어가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은 시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갈 가능성이 크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소설은 '서사' 의 외피를 입고 있기에 아직까지 상당한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고 간혹  '영화' 나 '드라마' 로 제작되기라도 하면 대박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문단은 평단의 검증을 받고 등단해야 작가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어서 그런지 대중들과의 거리가 다소 멀다. 대중들에게 한국 소설은 다소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말할 거리를 풍성하게 해주는 다소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을 선호하기에 평단은 열광하는 소설을 정작 국민들은 잘 모르거나 알아도 시큰둥한 경우가 흔하다. 소설이 성공적으로 영화화된 경우는 그나마 공지영, 김려령, 김애란 작가 정도가 생각난다.


석우는 독립영화판에 답이 있었던 적이 있기나 했냐고 되물었다. 그래,  아는 얘기 계속하는 거야. 계속 답이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버티다가 하나둘 떠나는 거지 .   있나...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노답일 수가 있지. , 열받네 진짜...그런데 누구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수는 없잖아. 결국에는 돈을 벌어야 사니까.


선배 그거, 건설현장에서 일해서  돈으로 매년 찍는 거야. 선배가 예전에 나한테 그랬어.  벌어서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겨우 자기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있다고. 이때 나는 내게 다가올 미래를 약간 외면하고 싶었는데, 다들 그랬는지 모두 별말 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종로 3가역 출구로 나가면, 영화로부터 도망칠 출구가 없었다...내가 처음 실제로 단성사를 봤을 , 단성사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부도를 맞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나, 청춘의 나는 언제나 소설에 빠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 손에는 언제나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가족 여행을 가서 여동생이 내가 안 놀아준다고 책을 숨기곤 했을 정도로. 시도 좋아했지만 나를 국문학과로 이끌었던 것의 팔 할은 소설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점심 시간이면 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렸고 거기서 수많은 소설을 읽었다. 박경리, 조세희, 박완서, 공지영 등등...의미도 잘 모르면서도 그 없는 시간을 쪼개서 틈만 나면 읽었다. 고등학생의 나는 어느 순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설이 미친 듯이 좋았고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세상에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으며 세상 모르는 어린 나의 생각에 나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시절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생활 패턴 자체가 자유로워져서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마음껏 배우고 향유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은희경과 신경숙을 비교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던지. 김영하, 한강, 정이현, 김소진 등 당시 젊은 작가에 대해서 발표하고 레포트 쓰고 토론할 때에 얼마나 살아있음을 느꼈던지. 현대 소설 담당 강사님들과 교수님들은 대체로 젊었고 강의도 괜찮았다.(감옥에 가신 한 분 빼고는 대체로 인성도 괜찮았다)


 틈틈이 소설도 썼다. 학생 문예에 제출했지만 본심까지 올라갔지만 떨어졌다.(감옥에 가신 분이 써준 심사평이 아직도 기억난다. 본심에 올라간 것이 한편으로 뿌듯했지만 뛰어난 재능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매년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학이 좋았다. 당장 등단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 옆에 있고 싶었다. 대학 4학년의 나는 대학원에 가서 문학을 연구하면서 소설이나 평론을 쓰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던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물었다. 집은 좀 잘 사는 편이니?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의  장편 영화를 보기 위해  하루를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수가 없었다. 주말에 대전으로  계획을 짰다. 무엇이, 어떤 힘이, 도대체, , 나를 낯선 곳까지 이르게 만들었는지   없었다


인디스페이스 관객석이   있는 모습을 살아생전   있을까...누군가는 '자기들끼리' 찍고 '자기들끼리' 보고 '자기들끼리' 해먹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기들끼리' 라도  보면, 정말로 독립영화를   사람이 없었다.


요즘은 영화제 가서  받는다고  데뷔하는 것도 아니니까. 영화 찍으면서 애들 가르치는 거지. 근데   그런  어디 있어. 지혜의 말처럼, 정말로 이건 영화만의 일도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예술을 배운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서 일을 했다. 문학을 전공했든, 음악을 전공했든, 무용을 전공했든, 미술을 전공했든, 연기를 전공했든.  동기들도 때에 따라 과외를 했고 학원에서 일을 했다...그래, 이제 세상 모든 예술학교는 사범대지. 내가 말했고, 지혜는 이럴  알았으면 영화 만드는 법만 배우지 말고 영화 가르치는 법도 배울  그랬다고 했다.


 교수님은 대부분의 대학은 모교 출신 남자를 교수로 채용하는데 우리 학교는 현재 재직하는 교수가 죽지 않는 이상 자리가 안 날 거라고 했다. 결국 시간 강사로 평생을 떠돌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24살의 내게 대학 시간 강사란 처우 개선을 해달라며 국회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강사분들을 다루는 신문 기사에 대한 이미지로 존재했다. 기사에는 강사분들이 방학이면 월급이 안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같은 학교 불문과 다니는 후배와 다른 학교 영문과 다니는 친구는 대학원을 고수했다. 미국 유학을 앞두고 친구는 말했다.


"대학원비를 감당해줄 수 있는 남편을 만날 수 있게 기도해줘."


 미국의 대학원비는 물론 어마어마하겠지만 내 친구 중 가장 당당하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였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다소 놀라웠다. 그 친구는 결국 아이비리그 출신 변호사와 결혼했다. 불문과 대학원에 진학한 후배도 결국 회계사와 결혼했다.


 평생 경제적으로 독립을 못하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삶은 내 적성에는 맞지 않았고 나는 국문과 대학원을 접었다.


'먹고 사는 일은 중요해. 금수저도 아니고.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평생 일을 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의 일을 했는데 얼마의 돈을 받는가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24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다른 길을 향했다. 문학이 아닌 교육의 길로. 그럭저럭 괜찮았고 원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던 길로.


 이후에도 신춘문예에는 20대 후반까지 투고하기도 했고 한국 소설은 꽤나 열심히 챙겨보았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몇 년간 구독하기도 했다.(창비가 신경숙 표절을 옹호하기 전까지...) 서점의 한국 소설 코너에 가면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 코너에 내 이름을 건 소설이 있게 될 거라고 꿈꾸던 뜨겁고도 설익은 청춘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점차 쏟아지는 신간들 위에 적힌 생소한 작가들 중 나보다 어린 작가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부러움과 질투를 누르며 책장을 넘겨보곤 했다.


지혜야, 나중에 애들은 오규현을 탓할지도 몰라. 그때 선생님이 영화 찍는 법만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내가 영화에 대한 꿈을 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


선생님, 독립 영화 감독 되면 정말 그렇게  불행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 , 불행하지 그럼. 근데 감독이  되어도 불행해. 지혜는 그렇게 말하고,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표정. 지혜는 메소드라고 했다. 다음날 그애 과외 그만뒀잖아.


  과거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소설을 읽으며  이상 소위 ''  되지 않는, 종사한다고 해도 먹고살  없는 예술, 혹은 학문을 떠나는 나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다. 문학을 연구해서 석사 학위, 박사 학위 따도 교수는 되기 힘들고 평생 춥고 배고픈 강사로 떠돌아야 해서 문학을 연구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 시를 쓰고 소설을 써봐야 먹고   없으니 다른 일을 하러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독립 영화판을 떠나려고 결심하는 소설  주인공이 마치 24살의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의 작가는 실제로 영화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소설  주인공에 작가를 투영한 것이라면 '영화를 그만두겠다. 그만두고 영화 말고     있는 것을 찾아보겠다'  말한 주인공은 쉬면서 소설을 쓰게 되었고 등단에 성공하여 작가가 된다는  이야기를 상상할  있다. 등단이 수백에서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비록 영화는 그만뒀지만 행운아라고   있다. ​

관객들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예술 뽕만 차올라서 그러지. 안타까워. 나는 그거 이기적인 거라고 본다.  설마 예술할  아니지?...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영화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영화만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혔다. 누구는 마약도 하는데, 저는  예술 뽕도  맞아요?  저는 그것도 하면  돼요? 그럼 저는    있죠?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가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힘내, 정신 차리고. 정말 너만 보면  마음이 아파.  어릴 때를 보는  같아.  열정 알겠어. 그렇지만 순진한 생각 그만둬.  되는   되는 거야.  사람 말이 맞았다.  되늰   되는  맞았다. 그래,  되는   되는  맞는데, 순진한    되는 걸까.


독립영화  없지. 독립영화는 미래가 없어. 독립영화 망했어. 그런데 우리가 독립영화의 미래를  적이나 있었나. 언제나 독립영화의 미래는 상업영화였다. 그게 우리가  전부였다. 독립영화로 유명해지면 어느새 상업영화 감독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이곳에 머무를  없었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져서 머물  없었고, 유명하지 않으면 유명하지 않아서 머무를  없었다. 독립영화판은 유지될  없는 판이었다...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싶지만, 내가 생각해도 독립영화는    같았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독립영화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제작비가 부족하니 노동 착취도  쉽게 빈번히 일어났다. 자본 논리로 돌아가는  당연한 거야. 흐름이 그래. 맞아. 독립영화인들도 독립영화는  된다고 하잖아.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 미래를  적도 없으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미래를  적이 없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망했어. 성공한 적도 없으면서 망했다고 했다.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독립영화에 대해 물으면 대개는 혼자 말하다가 혼자 화를 냈다. 시팔, 죽어도 독립은 하지 . 도망쳐. 어차피 독립영화는  .


이태원 극장판이 영업을 종료했다. 나는 극장에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들을 하나둘 잃어갔는데, 이제는 극장마저도 잃어가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편의 독립영화를 찍고 사라졌다. 누군가는 독립영화를 만들다가 상업영호하 감독으로 데뷔한    편의 영화를 찍고 사라졌다. 이러나저러나 독립영화 감독은 사라졌다.  사람들, 어디서  하고 살고 있을까. 언젠가 짜잔 하고 다시 나타나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들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내가 가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얼마나  길을 갔는지, 가는 길이 멀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도 얼마나 최선을 다해 갔는지, 늦을까봐 조마조마해하면서 갔는지. 내가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내가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 도시 괴담 같은  아니고, 진짜 무서운 이야기야. 들어보고 괜찮으면 말해줘.  이번 상업에서도   넘게 연출부만 했다는 언니를 만났어. 연출부가  그렇잖아.  언니가 나이가 마흔 정도 됐거든?  미래 같기도 하고, 모두의 미래 같기도 하고. 근데 진짜 무서운  뭔지 알아?  언니,   후에도 어디에선가 계속 연출부 하고 있을  같아. 이제 시나리오 쓰는 법도 기억이  난대. 웃자고  소리인데, 이거 진짜 호러 아니냐? 석우가 아무런 말이 없어서, 잠시  안이 조용했다.  지금껏 모아둔 돈으로 반년만 쉬려고. 그냥  쉬면서, 영화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내가   있는 일이 혹시나 있는지 찾아보려고.  영화 그만둘지도 몰라.


기사님이 무슨 영화를 대전까지 보러 가냐고 해서, 나는 독립영화라는  있는데 그걸 보려면 멀리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멀리, 아주 멀리.  년도   일인데, 아직도 나는 그때처럼 가고 있었다.


영화. 아무래도 영화 같은 , 그만두는  좋을 것이다. 독립 같은  꿈도 꾸지 않는  좋을 것이다.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  생각을 지속시킬  있을까. 지속시킬  있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가 보인다. . 어둠. . 어둠. 연말이었고, 그렇게 밤이 지나고 있었다. 계속. 밤은 지나고 있었다.  


2. 제목 속 0%의 의미는?

 작품 해설에서는 0%의 의미에 대해서 '소멸'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0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라고 했다. 작가 인터뷰에서도 보니 작가는 '미래가 없고, 미래가 없고, 미래가 없다' 고 반복하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로 썼다고 했다.


 나는 늘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늘 긍정적인 면을 보기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우선적으로 보고 그것을 대비하고 극복하려는 성향이다. 24살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제목의 0%를 부정적인 의미로 읽었다. 나는 이번에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면에만 집중했지만 누군가는 긍정을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다. 꼭 예측이나 확률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답이 없다는 독립 영화조차도 올해 독립 영화 '미나리' 의 눈부신 도약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보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한국사 능력 시험으로 역사가 빵 떴던 바가 있고 트로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르신들이 흘러간 추억을 떠올리는 노래 정도로 인식되던 트로트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확 떠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대중들에게 잊혀진 판소리라는 장르도 이날치라는 팀의 등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래서 세상은 살아봐야 아는 것이라고 하나보다.


 앞으로도 어떤 변수로 문학이 뜰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등단을 하거나 못하더라도 책을 내면 인세는 얼마 못 벌어도 글쓰기 강좌로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브런치라는 일반인 글쓰기 플랫폼도 유행하고 있고 문학이나 문예 창작을 전공한 작가 지망생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작가를 꿈꾸는 세상이 되었다.  


 0%가 부정이 아닌 긍정의 의미였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읽으며 생각한다. 24살의 내가 조금만 더 낙관적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더 느긋했으면 어땠을까? 좀 힘들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교수님이 나에게 집안 형편이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0퍼센트가 소멸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야를 가졌다면? 아마 지금보다 좀 더 가난했겠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그것으로 인한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았을까.

3. 요원한 '예술가 복지' 로의 길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작가' 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셀럽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활자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있던 나같은 아이가 아니더라도 '작가' 가 가지는 위상이 있었다. 스마트폰 이전의 시대, 그들은 신비했고 희소했고, 존중받았고 인정받았다. 지금보다는 시와 소설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전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언젠가부터 '시인' 이 가난의 상징처럼 신문 기사 같은 곳에 등장하곤 했다. (물론 교사 출신 시인들도 꽤 많고 그 중에선 장관이 되신 분도 있다. 하지만 아닌 분들도 많다. 내가 관심있게 지켜보니 그런 경우가 더 눈에 뜨이는지 모르겠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시인, 대학교 전공 시간에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시인이 생활보조금 대상자라는 보도, 아나운서와 시인이 결혼한 것이 마치 신분을 초월한 세기의 로맨스인 것처럼 보도되는 모습 등을 보며 시대가 변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바야흐로 시대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이미 디지털 시대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도 스마트폰이 등장하며 변화의 물살은 더 급격해졌다. 꽤나 세련되고 지적인 직장 동료들도 스마트폰이 있으니 책을 안보게 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문학의 토양은 점점 더 척박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사랑하던 북카페 '토끼의 지혜' 라는 곳이 있었다. 책이 웬만한 작은 도서관 수준으로 많았고 실내가 조용하고 청결하게 유지되어 정말 사랑해 마지 않던, 아끼던 공간이었다. 반복되는 직장 생활에 지루함과 가끔은 스트레스나 환멸을 느낄 때도 주말에 토끼의 지혜에 앉아 그 날 고른 책을 읽다보면 마음의 생채기와 스크래치가 모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이 카페는 홍대와 강남역에 있었는데 나는 주로 강남역에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카페가 강남역에서 논현역으로 이전했다. 강남역 인근의 높은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걸까. 그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섬뜩함을 느꼈다. 작년 초에 가고 한동안 안 가다가 올해 초에 오랜만에 가보려고 지도앱에서 검색을 했다. 그런데 지도앱에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라고 뜨는 것이 아닌가. 급히 인스타를 찾아보니 이미 영업을 종료했다는 것이었다. 그 토끼의 지혜가 없어지다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는데. 그 뒤로 다른 북카페를 여러 곳 가보았고 거기보다 인테리어가 세련되고 전망이 좋은 곳도 있었지만 어떤 곳도 토끼의 지혜처럼 책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토끼의 지혜가 그립다. 좋아하던 북카페가 없어진 경험은 이 때 뿐만은 아니다. 홍대역 근처의 카페 콤마도 책이 아주 많은 곳이었는데 없어졌다. 북카페는 왜 자꾸 없어질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기 때문인 걸까. 언젠가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사라지지 않더라도 종사자들이 줄어들어 그 질이 떨어져서 사라지지 않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선득했다.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다루었던 것을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런 나의 심정을 담아 말했다. 이 땅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계 때문에 위험에 처해있고 그들이 예술을 그만두기 시작하면 예술이 소멸될 수도 있다고. 이들을 대중들과 정부가 지지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독서 모임을 함께한 두 분은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  5일을 일을 하고 겨우 이틀 하고 싶은  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고집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힘들  알면서도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제적 고통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몫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은 예술가 뿐만 아니라 부지기수로 많다. 문닫는 자영업자, 사업가가  둘인가. 그들을 어떻게  구제하나. 그리고 예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같다.


 그들의 명쾌하고 이성적인 답변에 반박할 말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몇 주간  생각한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같이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만 해도 월 300만원 상당의 생활비가 나오는 나라도 있다고. 그 나라의 예술가의 복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 나라의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의 수준에 비례한다고. 국가가 예술가의 복지를 어느 정도 부담해준다면, 그래서 예술가들이 가난이나 경제적 이유로 예술을 떠나지 않고 계속 예술 활동을 한다면 그 혜택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그래서 파리에 여행가면 재즈바에서 맥주 한 잔만 시키고도 수준 높은 재즈를 몇 시간이나 들을 수 있다고. 반면 서울의 재즈바에서 그 정도 재즈를 보려면 자리값과 의무적으로 시켜야 하는 메뉴값, 음료값을 다 합치면 3만원 넘게 써야 하니 자주 가지는 못하게 된다고.


 예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요즘 많은 사람들은 시를 읽는 대신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에 더 열광하고 소설을 읽는 것보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웹툰을 더 좋아한다. 노래, 영화, 웹툰 모두 훌륭한 장르들이다. 나도 그들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시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다. 활자의 세계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매혹이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장르도 대신하지 못한다.


 시와 소설이 앞으로도 계속 번성했으면 좋겠다. 시와 소설 뿐 아니라 존재를 위협받는 많은 예술 장르들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들의 복지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예술 장르라도 0%로 향해서 소멸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본인을 갈아넣어가며 힘들게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명맥만 겨우 유지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국민들이, 보편적 대중들이 예술을 더 가까이에서 더 쉽게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0%를향하여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예술가복지


   

매거진의 이전글 빨간머리앤에게서 배울 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