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재료로 쓰는 예술, 그리고 숙성의 미학에 대하여
요즘 ‘시성비(時性比)’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시간 대비 성능 효율을 따지는 이 단어는, 현대인이 시간을 얼마나 강박적으로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영상을 1.5배속으로 보고, 책은 요약본으로 읽으며, 최단 경로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 효율의 정점에 바로 생성형 AI가 있습니다. 프롬프트 한 줄이면 30초 만에 그럴듯한 발라드 곡이 나오고, 1분이면 화려한 유화가 모니터에 떠오릅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매끄럽고, 선명하며,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완벽한 결과물 앞에서 저는 자주 공허함을 느끼곤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빠진 것일까요?
#1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입니다
와인이나 장(醬) 맛을 흉내 내는 것은 쉽습니다. 화학적 배합을 통해 혀끝에 닿는 감각은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명품'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진짜의 가치는 맛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 맛이 나오기까지 견뎌낸 '물리적 시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고스란히 저장되는 재료입니다. 화가의 캔버스를 생각해 볼까요? 거친 마티에르(질감) 아래에는 수십 번 덧칠해진 물감의 층(Layer)이 존재합니다. 그 두께 안에는 작가의 망설임, 수정, 고뇌, 그리고 다시 붓을 드는 결단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AI는 최종 결과값인 ‘표면’을 출력하지만, 인간은 그 표면 아래에 시간의 ‘밀도’를 쌓습니다. 우리가 오래된 가구나 낡은 가죽 가방에 매혹되는 이유도 같습니다. 거기엔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2 비효율이 만드는 아우라(Aura)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 감동하는 대상은 대부분 비효율적입니다. 마라토너가 42.195km를 달리는 행위를 보십시오. 자동차를 타면 30분이면 갈 거리를, 그는 2시간 넘게 고통스럽게 달립니다. 효율로만 따지자면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에게서 전율을 느낍니다. 그가 기계보다 빨라서가 아닙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오롯이 자신의 몸으로 감내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AI가 만들어낸 창작물에는 이 '고통의 서사'가 없습니다. 입력과 출력 사이, 즉 과정이 0초에 가깝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결과물은 완벽할지 모르나,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완벽함은 금세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인간의 창작은 서툴고 느립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먼 길을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비효율적인 시행착오의 과정이 작품에 고유한 '아우라'를 부여합니다. "이 한 줄을 쓰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웠을까", "이 색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감을 섞었을까". 관객은 결과물 너머에 있는 창작자의 시간을 상상하며 비로소 작품과 교감하게 됩니다.
#3 안목은 시간을 읽는 힘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다시 '안목(眼目)'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좋은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화려한 색감이나 완벽한 구도를 알아보는 능력이 아닙니다. 표면의 매끄러움 뒤에 숨겨진 '시간의 무게'를 읽어내는 힘입니다.
모든 것이 30초 만에 생성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시간을 들인 것들의 가치는 더욱 귀해질 것입니다. 누구나 "만들기"는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숙성"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창작은 결과물을 뽑아내는 기술이 아니라, 그 결과물에 나만의 시간을 덧입히는 태도에 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빠른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기꺼이 멈춰 서서 시간을 재료로 쓸 줄 아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역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