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내가 가진 이름들의 의미
익명匿名
이름을 숨김. 또는 숨긴 이름이나 그 대신 쓰는 이름.
투명透明
1. 물 따위가 속까지 환히 비치도록 맑음.
2. 사람의 말이나 태도, 펼쳐진 상황 따위가 분명함.
처음 내가 사전에서 찾고자한 것은 익명의 반댓말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와 빗대어 짐작하건대, 스스로를 감추고 혹은 실제이름대신 사용하는 닉네임이나 작가명을 사용하는 것을 익명성이라고 명명할 때, 그 상대적인 의미로, 즉 그 자신을 낱낱이 혹은 누구라도 그 당사자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만큼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뜻에서 투명(혹은 투명성)이라는 단어를 빌어다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하여,내 사전 속 투명이란 단어의 함의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본다.
지금, 우리 사회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실체를 감춘 채 살아갈 수 있는 듯하다.
흔히, 필명, 예명, 가명, 세례명 등이 법적인 이름을 대신하여 사회생활 중에 통용된다.
주로 작가들이 사용하는 필명, 나역시 어쩌다보니 어줍짢은 필명을 두개씩이나 갖게 되었는데, 그 의도는 단순히 나를 감추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존재인 나와 글을 쓰는 나를 구분해 보려는 데서 출발했다.
처음 내가 OO이라는 필명을 쓴 것은 난생 처음 문학상에 응모할 때였다.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자신없음이 내 정서의 99프로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무언가 세상에서 의미있는 몫을 해내고자 하는 존재로서의 갈망은 본능적인 것이어서, 손닿는 곳마다 더듬어가며 끊임없이 읽고 쓰기를, 걸음마연습하는 아이처럼 이어가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해 무더운 봄과 여름을 지나며 내가 아는, 내가 할 수 있는, 어쩌면 할 수 있는지도 잘 몰랐던, 모든 능력과 피와 땀을 짜내어 단편소설 작품 하나를 완성해냈다.
그럼에도 나는 수줍음이 절반이상인 존재인지라, 누구에게 보여주고 말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며 그즈음 우연히 발견한 (서울이 아닌 지역의) 문학상 공고에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밀어넣기로, 가까스로 용기를 냈다. 내가 얼마나 수줍음이 많았나 하면, 그당시 동네 우체국에 가서 서류봉투에 넣은 출력본원고를 문학상위원회로 보내면서, 생면부지의 접수계 직원에게조차 부끄러워서 귓불이 새빨개질 정도였다.
우편물을 접수하는 짧은 순간에조차 나는 당장 그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날 한낮에 운전을 하여 집으로 가던중 삐삐가 울렸다.
아주 낯설은 전화번호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자리는 그 지역번호였던 것이다. 나는 의아한 생각을 누르며 근처 길가 주유소에 붙어있는 주황색 공중전화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삐삐로 수신된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은 낯선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너머로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너무나 아득해서, 이런 단어들만이 현재까지도 명멸明滅하듯 귓가에서 깜박거린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은 날씨는 무더웠고 한낮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은 축하메시지에 나는 잠시 당황하였고 이내 기쁨이 몰려왔다. 입을 다물어도 다물어지지 않고 웃음이 자꾸 터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물론, 등단이 그후로의 나날에 획기적으로 변화를 준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금을 받고 상패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할줄 모르고 제대로 해낸 것 없는 나에게도 이런 작은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한없이 기뻤다.
그로부터 여러 탐색경로를 거쳐 5년여만에 처음 내이름_필명으로 된 책이 출간되었다. 그것은 어린이용 우리말 도서였다.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 잊혀져가는 순 우리말의 뜻을 풀이하는 내용을 창작한 에피소드로 엮은 것이다. 그 책은 수년 간 높은 판매고를 유지했을 만큼 어린이도서로 인기가 적지 않았다. 그후로도 몇권의 어린이 청소년도서를 이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후 일반 단행본_화술에 관한 책을 의뢰받았다. 당시는 처세나 자기계발도서가 많이 소비되는 시기였다.
글의 주제에 관해 설명을 듣고 나는 고민했다. 앞서 냈던 우리말 책과는 성격이 아주 달라서 무언가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필명을 생각해냈다.
◇◇◇.이 이름은 솔직히 내 법적인 이름과 거의 비슷하다.
단, 그보다 조금더 발음이 용이하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어린이책을 쓰는 나와는 또다른 자아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의도에서 명명했을 뿐이다.
그 책 또한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고 쇄를 거듭하여 한동안 쏠쏠한 인세를 돌려주기도 했다.
그후로, 한동안 책들을 계속 출간하면서 법적인 나와 어린이용 글을 쓰는 나, 일반 단행본 원고를 쓰는 내가 헛갈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결과적으로 출간시에는 이 이름을 주로 쓴다.
천주교신자인 나에게는 세례명도 있다.
오틸리아. 맹인들의 수호성인이라는 성녀 오틸리아를 나의 세례명으로 삼은 것은 순전히 남편 때문이다. 그는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당신은 눈이 예쁘다'고 말해왔다. 그게 정말인 줄 믿었던 나는, 세례명을 선택할 때도 눈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 오틸리아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틸리아란, 흔치 않은 세례명이며, 세월이 갈수록 나에게 의미있고 소중한 세례명이 되었다. 또 세례명은 자신의 생일과 인접한 시기의 축일에 해당하는 성인으로 선택하기도 하는데, 나역시 오틸리아의 축일 12월13일과 내생일 12월6일이 가깝다는 것도 선택의 이유였다.
이처럼 이름_필명, 세례명에는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게 된다.
그외에 예명 혹은 가명도 있다.
예명은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예능인(연예인)들이 활동시에 쓰는 이름이다.
예명을 쓰는 이유는 대중들에게 좀더 불리기 쉽고 기억되기 쉽다는 것일 듯하다. 예전에는 한글로 예명을 지었으나, 이제는 영어이름도 많다. 글로벌한 시대에 살다보니 이름조차도 영어식으로 통용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 모든 이름들이 처음에는 그 자연인인 자아와 사회적인 자아를 분리하고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는게 맞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면 한사람의 자아에게서 그 법적인 이름과 예명 혹은 필명을 절대적으로 분리하는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다 아는 배우 고 신성일의 본명이 강신영인데, 대중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신성일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자신 역시 본명보다는 수천 만이 기억하고 불러주는 이름인 신성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 않았을까.
가명이란 실제 자기이름이 아닌 것, 가짜이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가명은 좀더 은폐의 의미가 강조되는 듯하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고싶지 않은 이들이 붙이는 이름.
반면, 아이디는 정보·통신 인터넷에서, 이용자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고유의 체계로서, 문자나 숫자 따위로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필명이나 예명 등과는 분명히 다르게 다루어야 할 듯하다.
아이디는 그 작명의도가 보다 철저한 익명성을 근본으로 한다고 생각된다.
굳이 따지자면, 필명이나 예명보다는 감추려는 의도가 더 크게 짐작되는 가명 혹은 아이디가 익명성을 더욱 크게 내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작가님들도 다양한 작가명을 사용한다.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엉뚱한 영어단어를 갖다붙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각자 나름대로 스스로가 내포하고 혹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전달하려는 의도가 전제되었을 거라 믿는다.
나에게도 그런 의미이지만, 3자가 보기엔 어쩌면 밑도끝도 없이 뜬금없는 작가명[somehow]이 의아하다 싶을 수도 있겠다.
그 작명의도는 단순하다.
네이버사전에서 찾으면 이런 뜻이 나온다.
언제부턴가, 그런대로 평범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바람처럼 그런대로 특별할 것 없는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것이다.
또한, 나는 능력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왔고 부족할 지언정 그 시간들에 대해 기록하고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