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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가 되고싶다 Dec 21. 2020

[3] 친척 형의 이상한 행동 (feat.며느라기)

남편이 쓰는 '며느라기와 현실' Ep3.


1,2화에서 밝혔듯 우리 집안은 유난히 남녀 사이의 벽이 높다.


그게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부엌은 여자들의 공간이었고, 큰집에 도착한 남자들은 각자의 일정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휴식을 취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https://brunch.co.kr/@elephantasy/110


좀 더 자세히 예를 들자면,

큰집에서 재회하신 큰아버지들은 간식을 드시며 대화를 나누시거나, 고향 동문 모임에 참석하셨다. 큰 형들 역시 오랜만에 동문들과 모임을 갖거나 사우나를 가는 편이었다.    


나는 주로 친척 동생들과 공을 차거나 뒷동산에 오르고, 용돈을 받아 동네 슈퍼를 다녀오곤 했고, 운전이 가능한 대학생이 되면서 읍내 PC방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척 형의 이상한 행동


다른 남자들은 대부분 밖으로 외출을 할 때 유독 큰집에 머물러 있는 형이 있었는데, 외출을 하더라도 다른 분들처럼 밤늦게 귀가하지 않았고, 주로 부엌에서 필요한 것들이나 뭔가 요청을 받아 구매를 하기 위한 외출이었다.

(형이라고 했지만 나이는 나보다 15살 정도 많은 유부남이었다)


'저 형은 서울에 살아서 시골에 친구가 없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형은 늘 부엌 주변에 머물렀다. 머물렀다.. 라기보다는 부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부엌으로 통하는 출입문 주변에 걸터앉아 있거나 그 주위를 서성이며 늘 부엌을 향해 시시한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부엌에 들어가 큰어머니들 사이에 끼어 앉아 본격적으로 농담 따먹기와 잔일을 하기도 했다.


그 형이 이 글을 읽게 될 가능성이 아주 낮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내 눈에는 그게 정말 이상해 보였다. 형이 하는 농담들은 하나같이 썰렁했고, 왜 굳이 좁은 부엌에서 큰어머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재미도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물론 큰어머니와 형수님들은 재미있어하셨던 것 같다)  


어쨌든 내 시각에서 그 형의 행동은 너무 이상했고 어딘지 모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형이 절대 브런치를 읽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는데,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저 형 왜 저래요?"라고 물어본 건 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나에게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경험에 의한 깨달음


시간이 흘러 나도 결혼을 했고 아내와 처음으로 명절을 보내기 위해 큰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바로 깨달았다.

내가 바로 그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걸.


내 어머니, 큰어머니와 형수님들이 해오셨던 그 행동과 똑같이, 큰집에 도착하자마자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아내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아 시댁 큰집에 내려온 토끼같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아내는, 추리닝(운동복) 바지에 헐렁한 티를 입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 몇 시간을 서 있어야만 했다.  




매년 명절과 제사 때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해 '누군가' 항상 그 자리에 서서 몇 시간 동안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봐 왔지만.. 바보같이 그 '누군가'의 자리에 내 아내가 서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질 못했다.

 

사우나? PC방? 당구장?

아니 차라리 누가 나에게 고무장갑을 끼워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큰어머니들 사이에 앉아 전이라도 부치고 싶었다.


그것도 안된다면 아내가 보이는 부엌 문턱에 걸터앉아 부엌을 향해 시시한 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그 농담이 재미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모든 게 낯선 환경 속에 놓인 아내에게 내 목소리와 내 존재가 느껴질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설거지옥에 빠진 아내의 손목을 낚아채고 저 멀리 도망가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미안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친척 형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수년에 걸친 나의 의문과 추측이 풀리기까지는 그 누구의 어떠한 설명도 필요없었다.


나의 경험 한번이면 충분했다.


그 형의 마음을 십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형은 이상한 남자가 아닌 멋진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나는 형보다 한발 더 나아가겠다고.


https://tv.kakao.com/v/414807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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