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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가 되고싶다 Dec 30. 2020

[5] '내 아내의' 명절 증후군과 며느라기

남편이 쓰는 며느라기 ep.5


결혼 후 처음 경험한 설날과 추석은 그야말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세 번째 명절이 다가올수록 우리 부부는 각자의 이유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명절은 깜빡이 한번 없이 치고 들어온 현타에 무너졌고, 두 번째 명절은 알면서 눈뜨고 당했다는 좌절감과 죄책감이 나를 무너뜨렸다. 모르긴 몰라도 내 아내가 느낀 심신의 피로는 나보다 컸을 것이다.



'남편이 쓰는' 며느라기와 현실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magazine/minsarin



방송에서만 보고 듣던 명절 증후군


일 년에 두 번씩 미디어에서는 명절 증후군이라는 이야기로 뜨거웠고, 나는 그게 장거리 운전으로 오는 피로감 정도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경험한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고속도로 정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에고.. 부산까지 가는 사람들은 참 힘들겠네..'라고 1초 생각하고 끝. 그게 결혼 전의 내가 공감했던 명절 증후군이었다.


그런데 웬걸........

결혼 후 내 아내와 어머니의 명절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내가 알던 그것은 '명절 증후군'이 아닌 단순 어깨 결림에 불과했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 한번 켜고 목 10번, 어깨 10번, 골반 10번 돌려주면 상황 종료.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한 봉지와 아아 한잔 사 가지고 돌아오면 대충 견딜만한 정도.




명절이 싫은 아내와 명절이 두려운 남편


두렵거나 싫거나 한 끗 차이겠지만, 확실한 건 명절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내만의 이유로. 나는 나만의 이유로.


설마 없을 리가 있겠읍니까 교수님 (^-T)


결혼 이후 몇 번의 명절을 경험하고 나니 돌아올 명절에는 어떤 현실이 반복될지 눈에 뻔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안 가거나 늦게 내려가고 싶었다. 가더라도 최대한 짧게 머무르고 오려고 했다. 아내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아주 솔직히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냥 명절이라는 단어가 싫었고, 언론에서 남의 속도 모르고 명절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하는 것도 싫었다. 우리 부부에게 명절은 곧 불편함과 미안함, 그리고 서운함의 공존이었다.


우리 집안의 명절 특집 며느라기는 Ep.2~4회 차에 자세히 적혀있다.




명절마다 대가족이 모이는 큰집은 방 2개 화장실이 1개 있는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평소에는 큰집 식구분들이 거주하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문제는 명절이 되면 스무 명이 넘는 친척들이 그곳에서 최소 1박 이상을 보낸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강시 영화를 즐겨 봤다.

그래서인지 시골에서 잠을 자면 항상 손톱을 길게 기른 강시가 새벽에 집안으로 쳐들어오는 꿈을 꿨다. 그래서 새벽마다 잠에서 깼는데, 그때 늘 내 양옆에 건장한 친척형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이 큰 위안이 됐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했다.


명절마다 스무 명의 사람들이 한 뼘 간격으로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환경이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뿐이 화장실 앞에서 시댁 식구들과 마주치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인지..


나는 미처 몰랐다.


생각해보니 나는 군대에서도 그런 환경을 경험하지 않았다. 아내는 더욱이 그런 경험이 없었겠지. 물론 시댁 큰집이 반드시 호텔급 환경을 갖추어야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그 환경을 경험한 나와,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받아들여야 하는 아내의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순간에도 그 경험을 몇 번이나 해야 했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그렇게 불편하면 밖에서 자고 들어오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이다. 심지어 차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모텔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아침 7시부터 제사음식을 준비 시간에 맞추려면 최소 5시 반에는 일어나서 준비하고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누구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친척형도, 어떤 며느리도.. 둘이 모텔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 제사 준비에 맞춰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나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아내의 불편함을 헤아리지 못해서. 친척형, 형수님, 큰어머니,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반응을 감히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내에게 더욱 미안했다.  




우리 어머니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떻게 이겨내셨을까.. 아니 어쩌면 이겨내야겠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 문화를 받아들이셨겠지.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낯선 환경이 아닐 수도 있었을 테고. 내가 지금에서야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만큼 힘들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번외-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 공유한 명절증후군 극복 방법 (출처: 보건복지부)


연휴의 마지막은 가족들과 함께 하면 좋겠지만, 그 가족 범위에 '시댁은 제외'라는 문구가 추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연휴의 마지막은 개인 시간을 갖고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보내는 게 최고 아닐까..라고


혼자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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