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현 Dec 26. 2022

조선총독의 '성스러운 전쟁'과 일본의 '반격능력'

전후(戰後) 일본 굴지의 정치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자신의 논문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를 통해 일제 파시즘의 무책임성과 그 안에서 암약했던 전범(戰犯)들의 왜소한 인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이에 해당 논문에는 1946년 도쿄전범재판, 즉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피고로 기소된 몇몇 전범들의 재판 진술이 인용되고 있는데, 식민지 조선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의 진술도 사례로서 등장한다. 여기에 따르면 미나미 총독은 ‘왜 당신은 그것(중일전쟁)을 성전(聖戰)이라 불렀느냐’ 며 묻는 재판관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당시 일반적으로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침략적인 그런 전쟁이 아니라 상황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미나미 총독의 대답은, 마루야마의 해석에 따르자면, 자신의 결단을 원칙으로 드러낼 용기는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은폐하고 도덕화 하려는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것이 실재고 허상인지, 무엇이 목적인지, 책임이 따르진 않는지 등에 대한 의식 없이 자신들이 살포한 슬로건에 맹목적으로 말려들었으며 또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였다는 비판이다. 흔히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들 하지만, 이 경우처럼 언어가 사용자의 자각 없이 난무할 땐 어떤가? 언어가 존재 자체를 잠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미나미 지로(南次郎), *출처: 위키백과

지난 16일, 본 정부는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을 담은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3개 문서 개정안을 각의 결정했다. 이른바 ‘반격능력’의 보유가 그 핵심이다. 유사 상황에서 적이 무력공격에 착수한 것이 확인되면, 일본은 그 자신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아도’ 자위 조치로서 상대 영역에 유효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반격’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믿어버리면 편하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성전’이라는 단어처럼, 무시무시한 본질을 애써 왜곡하는 경우다. 실제로도 ‘반격능력’은 올해 초 故 아베 전 총리 등이 공론화시킨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논의를 기초로 정립된 개념이다. 명칭을 ‘공격’에서 ‘반격’으로 순화(4월)시켰을 따름이다. 이 같은 명칭변경은 전수방위의 원칙 무력화에 대한 비판여론을 피하기 위한 술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렇듯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도 한국 정부와 언론은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특히 언론의 경우, 다수의 매체가 ‘반격능력’이라는 일본의 워딩을 그대로 받아쓰기만 할 뿐, 그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는 소극적이다. 열렬히 일본의 입장을 홍보해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몇몇 기사들에는 ‘선제공격을 당한 일본이 북한을 향해 보복하는 건 당연하다’는 취지의 댓글이 다수의 공감을 받고 있다. 반격능력이라는 ‘순화된’ 말 아래 감춰진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적 기지 반격 능력’을 명시한 국가안보전략을 각의(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뒤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한겨레>

이처럼 ‘반격’이라는 단어는 선전자의 의도에 따라 ‘정의로움’의 탈을 쓸 수도 있는 단어다. “되받아 공격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통해 침략의 의도를 상쇄할 수 있으며 자위권(自衛權) 차원의 대응이라는 논리를 붙여 명분을 보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헌장 51조 등에서도 자위권의 사용은 제한적으로 인정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만 잘 내세우면 무력 발동에 대한 지지 또는 묵인을 받는 것이 국제현실이다. 지금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반격능력에는 이런 키워드들이 은밀하게 녹아있다.


지난 역사에서 전쟁의 명분이 되어왔던 언어들을 한번 살펴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되어 있다. 예컨대 러일전쟁 당시 적극적인 개전론을 주창했던 다카하시 사쿠에이(高橋作衛)는 ‘국가가 존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근 국가의 보전을 필요로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조선에 대한 침략의 논리를 완성했다. 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의 ‘자존자위’ 달성과 ‘동아민족에 대한 해방’이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너무 먼 옛날의 이야기인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 접근을 열망’하기 때문에 자위권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런 말들은 어느 날 한 순간에 나부끼는 낮도깨비 같은 말들이 아니다. 자각 없이 방치하면 우리도(한국), 그들도(일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미나미 지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참고문헌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김성근 옮김

-박양신, 「러일전쟁 개전론과 ‘7박사’」, 진단학보


**본 글은 필자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2022.12.26.)의 원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원래 네 글은 재미가 없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