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들이 모여
클레어 키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원작 "맡겨진 소녀'를 영화로 만든 "말없는 소녀"를 통해서이다. 영화가 인상적이어서 책을 찾아서 읽었다. 작년 11월 다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출간되었다. 단숨에 읽었다.
이 소설은 실업과 빈곤이 닥친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가 배경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파는 일을 하며 딸 5명과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열여섯에 미혼모로 빌 펄롱을 임신하여 냉대를 받지만, 그녀를 고용하고 있던 미시즈 윌슨이 그들을 돌보아 준다. 함께 일하던 네드 역시 아버지를 모르는 펄롱에게 최선을 다한다. 이들 덕분에 10대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펄롱은 잘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간 펄롱은 창고에 맨발과 초라한 모습으로 갇혀 있는 소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이 소설은 허구이지만 아일랜드 가톨릭 수녀회가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일어난 일을 연상시킨다. 그곳에서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참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시키고 미혼모의 자녀들을 팔아넘겼으며 수많은 여성의 인권을 짓밟았다. 용기 있는 사람들의 증언과 글들이 모여 진상이 파헤쳐지고 총리가 사과하기까지 무려 70년 이상이 걸렸다.
작가는 첫 페이지에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고 썼다.
펄롱은 자신이 받았던 대가 없는 선의와 사소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수녀원 창고로 가서 소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소설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독자들 각자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상 속 사소한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펄롱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펄롱의 가족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래도록 생각이 많았던 독서였다.
올 12월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영화가 개봉을 했는데 이상하게 개봉관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서 상영을 해서 늦은 밤 차를 달려 보고 왔다. 책은 책 나름대로 영화는 영화 나름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방식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다르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를 추천한다. 책의 디테일 안에서 영화를 보면 훨씬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도 이 소설의 배경인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살고 있다. 그의 연기에 경의를 표한다.
갑자기 선포된 비상계엄, 충격,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의 빠르고 현명한 대처, 계엄해제, 탄핵안 가결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지금, 우리의 일상은 몹시 흔들리고 있다. 우리의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뒤흔든 자들에게 관용은 결코 없다.
시민들은 겨울날 추운 광장에서 골목에서 작은 불빛들을 모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위대한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뭐라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켜낼 것이다. 우리들의 소중한 일상,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