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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Aug 12. 2021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오래  친구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안부를 물으며 넌지시 만남을 제의하는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청첩장을 주려고 하는 구나.


코로나 시대에 조심스러웠으리라. 단 한 번의 결혼식. 제 인생 모든 페이지에 있던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 친구와 단 둘이 대면하는 게 얼마만인가. 살아온 세상이 달랐던 통에 대화 소재도 마땅치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루를 내어 그 친구를 만나고, 또 하루를 내어 그 친구의 결혼식을 가는 게 맞나?


유독 일이 몰려 있었던 시즌이라 더욱 민감하게 고민이 되었다.


결국은 그 친구를 만났다. 결혼을 앞둔 친구는 예전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친구는 고등학생 때부터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내내 한 사람과 연애를 했다. 하지만 청첩장에 적힌 상대방의 이름은 그 때와 달랐다. 친구의 이름 옆에 낯설게 적혀 있는 이름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 친구가 머쓱하게 웃었다.


- 나도 그 때 걔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걔’. 친구의 첫사랑이자 첫 연애 상대.


- 그런데 걔랑 결혼했으면 난 불행해졌을 거야.


친구는 담담히 자신이 비껴간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학생에서 군인, 취업준비생, 직장인. 그 사람의 모든 신분을 견디는 동안 친구는 자연히 그에게 길들여 졌다.


그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입대를 했다. 새내기로서 부푼 가슴도 잠시, 친구는 그와 매일 매일 전화통을 붙들고 싸워야 했다.


학과 행사는 커녕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는 것 조차 끔찍이 싫어하던 그 사람 때문이었다. 친구는 거절하고, 싫다고 맞서고, 나중엔 화를 내다가 결국 포기했다.


싸우는 게 피곤해졌다. 그냥 본인의 모든 욕구를 억제하면 싸울 일이 사라졌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친구는 맥없이 남자친구의 전화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의 하루 일과와 휴가 일정에 제 인생을 맞췄다. 그러는 동안 친구의 곁에는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동성친구들 간의 식사 자리도 안된다고 못을 박던 그 군인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리고 군인 남자친구와의 콜렉트콜 요금, 휴가 때면 쓰게 되는 데이트 비용 일체, 때때로 그의 통장으로 송금해주는 용돈. 그런 것들을 부담하느라 친구에게는 다른 이들을 만나 쓸 돈이며 체력도 남지 않았다.


- 그러고 제대를 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싶더라.


꿈에도 그리던 그의 제대날. 그는 꽃신을 준비해주지도, 전역모에 친구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탈하게 제대를 했다는 사실에 감격을 했을 뿐. 꽃신 신은 것을 축하한다고 친구에게 메시지가 몇 통 온 것을 보고는 “내가 제대 했는데 왜 네가 축하를 받냐”는 핀잔만 들었다고 했다.


민간인의 신분이 된 그는 친구들과 만나고,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고, 새내기라는 기분에 취해 사느라 너무 자주 친구를 잊었다.


- 내가 바란 건, 그냥 예전처럼 나를 봐주는 거였는데.


그에겐 ‘내’가 없었다.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게, 그 사람만 보게 만들어 놓고는 그는 너무나 훨훨 자유로워 보였다.


저는 친구들과 온갖 술자리를 하고 다니며, 이를 저지하는 친구에게 “그럼 너도 해”라며 뻔뻔한 말을 잘도 했단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주변에서 군대 간 남자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하던 말에 무슨 속뜻이 있었던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 남자친구는 달라요. 얘는 안 그래요.


기어코 믿고 싶었던 그 사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남자친구도 너무 흔한 사람 중 하나 였다는 것이 미치도록 괴로웠다.


그럼에도 그 관계를 끝낼 수 없었던 것은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걔 만큼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어. 엄마보다, 아빠보다, 나보다 걜 더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기고만장해진 그 사람을 참고 만났다.


싸우기 싫어서 친구는 자꾸만 굽히고, 그럴수록 그는 더 막무가내가 되었다. 친구가 잘못한 일이 아니어도 헤어지지 않으려고 빌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나는 대체 이 사람에게 뭘까 싶은 마음이 매일 매일 들었다. 함께 걷다가 예쁜 사람이 지나가면 괜히 위축되었다.


저런 여자가 이 사람에게 다가오면 어쩌지, 두 사람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도 안되는 자격지심과 피해망상이 제 가슴에 멍을 내도 멈추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절실하게 이 사람 밖엔 없다. 내 세상은 이 사람이 전부가 된다.


결국 이별이 온 것은 친구가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자기 자신이 말도 안되게 초라하게 보였다. 내 눈치를 보는 부모님께 미안해졌다. 매일 울다 잠드는 일이 문득 지겨워졌다.


오랜 방황을 하고, 지금 예비 신랑을 만났다.


- 덜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된다는 게 맞는 말 같아.


친구는 자연스럽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으로 대화를 끌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본 결과 예비 신랑은 제대로 된 연애를 이번에 처음 해 본 사람이었다. 중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연애 경험이 전무하다고.


그래서인지 예비 신랑에게서 종종 자신의 과거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뜨겁고, 절절하고, 애타는 마음. 친구는 이미 오래 전에 모두 건너왔던 그 감정이 저를 보는 예비 신랑의 눈에 비쳤다.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지만, 그 사람과 같은 마음이 더는 될 수 없는 현재.


그런데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나의 친구.


- 그래서 나는 예비 신랑한테 잘할거야.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아니까...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


그런 연애를 거쳐오는 동안 친구는 많이 단단해졌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었던 들뜬 치기를 지나자,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좋겠다는 뜨뜻미지근한 안정감이 다가왔다.


나는 그 친구의 결혼을 마음으로 축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에 상처 받은 20대 초반의 시절이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 있는 것을 씁쓸하게 보았다.


나의 연애는 나의 인생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어떤 연애는 전부가 되기도 한다.


연애란, 결혼이란, 여전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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