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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e Jul 12. 2022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한유주

커피프린스 1호점을 정주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커피프린스 1호점 속 주인공은 은찬이와 한결이라는 것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유주다.


유주는 도도하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 일에 욕망과 열정이 있고, 사랑보단 성공이 중요하고, 타고난 재능과 노력에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인물이다.


그런 유주가 뭐 그리 좋았느냐 하면 단연 ‘외모’다. 사실 유주의 얼굴과 분위기가 좋았다.


커피프린스1호점 방영 당시 2030 여성들의 워너비 스타일링이 유주였다고 하는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유주는 촌스럽지 않다.


호리호리한 체형과 검은 긴 생머리. 이지적인 옷차림과 단정한 말투. 묘하게 쓸쓸해 보이는 사람.


그 모든 것들이 당시 어렸던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그래서 꼭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런 옷차림을 하고 저런 말씨를 쓰고, 저런 분위기를 풍기고 싶다.'


그런데 유주와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스물네 살 은찬이와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그 때는 유주의 나이가 참 멀고 먼 어른처럼 느껴졌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삼십대 초반의 유주는 자신에게 확신이 없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파도치는 삶을 지내고 있었다.


물론 사랑에 있어서 유주는 ‘내로남불’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연인이던 한성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던 다른 남자 DK와 함께 뉴욕행을 택했다. 한성에 의하면 유주는 한성을 버렸다. 한성은 오래 무너져 있었겠지만 어느덧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유주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성공을 이룬 뒤 그녀를 찾아 온 것은 회환과 쓸쓸함, 옛사랑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렇다고 한들 조용히 추억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멈췄을 텐데 유주는 DK와 결별하고 한성에게로 돌아간다. 아니 돌아가려 한다. 그리웠다는 말로 모든 것을 포장한 채.



한성은 그녀를 밀어내다가, 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다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하다가, 결국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견고하지 못했다.


흔히 쓰는 말처럼 한 번 깨어진 것은 다시 붙인다고 한들 깨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러는 와중에 순수하고 명랑한 은찬에게 호감을 느낀 한성은, 그 사실을 유주에게 들켜 버린다. 한성에게 배신감을 느낀 유주는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봐도 명장면이라고 생각하는, 그 씬들이 탄생한다.


“난 쉽게 변하고 쉽게 끝낼 수 있지만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쉽게 마음을 옮기지도 않지만 한 번 옮긴 마음은 되돌리기 힘든 사람이야. 당신은 나랑 달라. 그래서 더 무섭고 화가 나고 그래.”
- 한유주


“은찬 씨 일 있기 전까지 당신한테는 나 말고 누구도 없었어. 충분히 어울릴 수 있는 여자 후배들까지 정말 모질다 싶을 만큼 다 쳐 냈어. 나 말고 다른 여자랑은 커피 한 잔 안 마셨어.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내 옆에 있어주고, 뭘 해도 용서해주고, 받아 주고, 항상 내가 첫번째인 사람. 근데 이젠... 당신이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감을 준거야. 그렇지?”
- 한유주


“너도 흔들렸잖아. 너는 되면서 왜 나는 안되는데? 너 나랑 지내면서 1년 넘게 DK랑 연애했어. 헤어지기 전날도 DK랑 있으면서 일 때문이라고... 믿기지 않았지만 넘어갔어. 믿지않는 날 '이런 미친놈. 너가 안 믿음 뭐 어쩔건데.' 그렇게 나 달래고 욕하면서 내가 너 놓아줬잖아.”
- 최한성


다시 봐도 유주는 이기적이지만, 그 때는 종잡을 수도 없었던 유주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간다.



유주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 뜨겁다가도 금세 차가워지는 마음을. 그리고 한성에 대해서도 잘 안다. 한성은 따끈한 가마솥 같은 사람이다. 느리게 끓어 오르지만 한 번 데워진 마음은 쉽사리 식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평생을 나밖에 몰랐던 사람이 다른 여자를 본다. 나만 보던 눈으로 다른 여자를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게 원하는 모습이 있다. 유주가 제 나름대로 한성에게 부여했던 역할은 무조건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리라는 것이었다. 한성은 그러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지만 긴 시간의 연애를 지나오며 유주는 한성을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느낀 배신감의 재질은 무엇일까. 유주는 제 엄마와도 냉랭한 사이를 유지한 채 지낸다. 가족에 대한 정이 없는 채로. 그런 유주에게 한성은 얼마든지 저를 받아주는 ‘집’같은 존재 였을까? 그것이 오만이라 해도 유주는 한성을 집으로 여기며 사랑했을 것이다. 때로 사랑은 오만이 잔뜩 점철된 모양을 하기도 한다.


한성의 배신에 비참함을 느낀 유주는 늘 그랬듯 한성을 먼저 버리기로 했다. 먼저 떠나는 쪽이 늘 덜 초라한 법이다. DK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유주는 한성을 떠난다.


하지만 한성은 유주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유주도 실제로 떠나지 않았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아주 태연히, 한성에게로 왔다. 그러고는 제 사랑의 크기를 편안하게 인정했다.



“내가 버려질 거란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다? 항상 당신이 날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 했었으니까. ... 우습게도 내가 당신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신한테 더 자신이 없어지더라?”
- 한유주


유주의 나이가 되면 유주만큼 솔직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유주가 용감했던 것이었다.


소소하게 좋아하는 씬 중에 하나를 꺼내어 본다. 재회 후 즉흥적인 둘만의 여행을 떠난 유주와 한성은 문구점 앞에서 오락을 하다가 결혼을 했냐고 묻는 주인 할머니와 대화를 한다.


서로는 오락에 열중한 채로 “얘는 바람 났었대요~”, “쟤는 다른 남자랑 살림도 차렸었대요~” 가볍게 일러 바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두 사람의 관계성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뜨겁게 싸우고 치열하게 질투하고 마음을 확인하느라 애 닳아야 할 시간은 이미 지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은 아니다.



유주는 한성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잠깐 아기 천사가 다녀 간다. 드라마 말미에는 아기를 갖기 위해 시험관 시술을 하는 듯한 대화가 오갔다.


그 장면을 보고는 왜 유주에게 평온한 사랑은 오지 않을까, 왜 작가님은 유주를 완연하게 행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생각 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 둔 유주가 시청자의 기억에 더 오래 남을 것으로 계산하셨는지, 단순히 유주가 애엄마가 되는 그림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지.


유주는 가끔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기 신발을 들여다 보며 밤을 뒤척이지만 그럼에도 한성은 변함없이 유주를 사랑하고 아껴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곡점이 오더라도 한성은 앞으로 굳건할 것이라는 뉘앙스였을까.


아이를 낳아서 기르면 종종 '아이 때문에 산다'는 말을 하는 부부가 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유주와 한성이 사랑 때문에 여전히 함께 하고 있기를, 유주의 프로포즈처럼 힘든 순간이 오면 노력하는 사랑을 하고 있기를 바랄 뿐.


여름의 청량한 색채를 가득 담은 드라마. 그리고 한 여름 바다에 비친 윤슬처럼 반짝이던 유주.


누가 더 사랑하나, 누가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나.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상대방을 시험하고 관계를 재단한다.


그러느라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지나오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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