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이성에게 한 적이 언제였을까?
신기하게도 그 대상의 이름이나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상황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아마도 대학 신입생 시절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커플로만 참여할 수 있는 축체가 있었다. 남중 남고를 나온 터라 여자라는 이성과 대화를 해본 게 선생님과 부모님이 전부일정도로 숫기가 전혀 없던 그런 남학생이자 신입생이었다.
커플축제에 참가하라는 선배의 말씀에 급히 우리 과 친구들은 옆 학교의 교대 여학생들과 단체 미팅을 잡게 되었다. 거기서 어떤 한 여학생을 만났고, 난 다짜고짜 커플축제에 함께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여학생은 그냥 재미 삼아 좋을 것 같았는지 흔쾌히 예스란 말과 함께 환하게 웃어주었다.
축제란 것도 처음이지만 더욱이 커플만 참여하는 축제는 더욱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옷을 입을지도 고민이 되었고, 우리들은 기숙사 거울 앞에서 그날 입고 갈 옷들을 입어보며 서로 품평도 해주었다. 그때는 그런 모든 것들이 즐겁고 들뜬 일들이었다. 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이 사주신 베이지색 마이와 흰색 남방을 곁들여 코디하였다. 나름 멋 부린다고 그랬는데... 그때 당신에 유행하던 브랜드가 시티보이 뭐 그런 게 있었다. 조금은 세미정장에 어깨뽕이 좀 많이 들어가 그런 스타일이었다. 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검정 스키니 청바지를 입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당시 딱 양아치 불릴 만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에게도 첫 도전이었다.
모두들 한껏 나름 멋을 부리고 축제장으로 이동했다. 그날 그녀도 평소에 입지 않았을 것 같은 긴치마를 입고 약속장소에 나왔으며, 위에는 청자켓 같은 것을 걸쳤던 것 같다. 지금도 얼굴을 기억해보려 해도 기억이 정말 나지 않는다. 축제는 인문관 학생식당에서 열렸다. 평상시에 놓여있던 식당 테이블들은 한편으로 모두 치워져 있었고, 커플들만을 위한 테이블과 어두운 조명. 천장엔 사이키 같은 조명도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사회가가 따로 있어 행사의 진행을 맡아주었다. 아마도 외부에서 섭외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유머러스한 농담과 진행이 매끄러웠던 걸로 기억이 남아있다. 우리 모두는 사회자가 말하는 데로 열정을 갖고 게임에 참가했다.
여느 커플축제처럼 대부분의 게임이 스킨십을 요하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가면서 그 위에 둘이 함께 서있을 수 있을 때까지의 게임이라든가, 과자와 같은 것을 입술이 닿을정도로 함께 먹는 게임등 그런 것들이었다. 조금은 유치 하지만 그 당시엔 나름 승부욕으로 게임에 임했고, 결국 우리 커플이 우승도 할 수 있었다.
사회자는 우리 커플에게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부추겼다. 순간 모든 커플들이 키스해! 키스해! 라며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우린 사실 이제 두 번째 보는 사이일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그 여학생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솔직히 어떤 감정이 있던게 아니었다. 핑계를 대자면 지금도 사람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우린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좀 전에 서로 건넨 말때문에 더욱 어색해진 우린 말없이 여학생의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봄날이지만 그날밤은 지금처럼 조금은 쌀쌀했다. 그래서 여학생에게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 주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하는게 매너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씌어 주었다. 우리가 걷는 길주변은 흰 철쭉이 피어 있었다. 웃기는 상상이지만 마치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그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철쭉이 우리의 사랑을 환하게 축하해주고 있었다. 어떤 말을 건네면서 그녀를 들여 보내야 할지 계속 고민했지만 이성을 만난 경험이 없던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기숙사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 보아야 했다. 그녀도 조금은 부끄러웠는지 뒷모습에서 그런 발걸음과 몸짓이 느껴졌다. 그만큼 그당시 우린 순진하고 순수한 시절이었다. 오늘밤 문득 생각 나 그냥 적어본다.
나도 그녀도 아마 서로 기억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그 느낌은 아직 내 가슴이 남아있다. 그 여학우도 나와의 이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그리고 우린 그 이후로 서로 연락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마 부끄러운 마음에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