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생 김지훈 (3)

2025.01.01

by 태석

새해가 되어 친가에 갔을 때 일이 터졌다. 네 식구는 아침 일찍 출발해 세 시간 만에 본가에 도착했다. 멀미가 심한 아내 정다현 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는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속이 울렁거려 장거리 이동 시에는 늘 직접 운전했다. 대신 조수석에 앉은 김지훈 씨가 뒷좌석에서 쉴 새 없이 다투는 아이들을 중재하고, 태블릿을 세팅하고, 간식을 챙겨 먹이는 일을 맡았다.


도착하자마자 김지훈 씨의 부모님은 외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반갑게 맞았다. 김지훈 씨 어머니 이선자 씨는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찜과 잡채를 한상 가득 차려냈다. 이선자 씨는 손주들을 자신의 옆에 앉히려 했지만 아이들은 어색해하며 정다현 씨 곁에 꼭 붙어 앉았다. 1년에 한두번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낯선 존재였다.


점심을 먹고 어른들은 거실에 둘러앉았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김지훈 씨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마침 새해 특선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화면에 집중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가 "민준아, 학교는 다닐 만하냐"고 말을 걸었지만, 민준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네"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할머니가 깎은 배 한 조각을 서윤이에게 건넸지만, 아이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김서윤, 할머니가 주시는데 왜 그래." 정다현 씨가 아이를 꾸짖었지만, 할머니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 이선자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경기가 많이 안 좋다던데, 지훈이 너네 회사는 괜찮니? 뉴스 보니까 폐업하는 스타트업들이 많다는 소리가 있더라."


"걱정마, 내년에는 추가 투자 받을수 있을거야."

김지훈 씨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S전자 계속 다녔으면 이런 걱정은 안 할 텐데. 남들 다 부러워하는 회사를 제 발로 나와서 고생이니."


정다현 씨가 보다 못해 거들었다.

"어머니, 그래도 지금 회사에서 팀장이고 인정받고 있어요. 애들 아빠 능력 있는 거 아시잖아요."


이선자 씨는 며느리의 말을 자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대기업만 하겠니. 사촌 동서 아들은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했다더라. 서울에 집도 사고. 요즘은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야. 지훈이도 기회가 되면..."


정다현 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어넘기려 할 때, 김지훈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를 끄며 말했다.


"고마 하시게."


김지훈 씨의 목소리는 분명 그의 것이었지만, 말투와 억양은 달랐다. 무거운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었고, 평소보다 낮은 톤이었다. 이선자 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들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정다현 씨가 급히 분위기를 바꿔보려 아이들 쪽을 보며 말했다.


"아, 민준이 서윤이 핸드폰 너무 오래 보는 거 아니니?"


하지만 김지훈 씨는 계속해서 이상한 말투로 이어갔다.


"지훈이가 원래 뭘 하고 싶어했는지 아시오? 처음부터 대기업 가고 싶어했던 게 아니라, 그저 우리가 원하니까 간 거 아인교."


아버지 김재명 씨가 놀란 얼굴로 아들을 쳐다봤다. 김재명 씨는 평생 과묵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내와 의견이 다를 때도 그저 조용히 있거나 짧게 한마디 하고 마는 편이었는데, 평생 아내 앞에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아들이 자신의 말투로 하고 있었다.


"지훈아.. 갑자기 왜 이러니?"


이선자 씨가 당황해서 물었지만, 김지훈 씨는 계속했다.


"지훈이가 고등학교 때 영화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도, 대학 때 창업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맨날 안 된다, 위험하다, 안정적인 게 최고다... 그렇게 말해서 애 날개를 다 꺾어놨잖소. 이제 와서 또 뭘 어쩌라는 게요."


김지훈 씨는 아버지가 늘 앉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무역회사 차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당신이 반대해서 포기했소. 평생 회사 다니면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참았소. 근데 지훈이까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소?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아시오?"


이선자 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남편의 한탄이 낯설면서도 아프게 다가왔다. 김지훈 씨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정다현 씨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보, 장난 그만쳐. 애들 놀라잖아!"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조차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어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다현 씨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말했다.


"민준아, 서윤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새배 드려야지."


아이들이 어색하게 일어나 절을 했고, 할머니가 미리 준비한 세뱃돈을 꺼냈다. 김지훈 씨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희 갈게요."

화장실에서 나온 김지훈 씨가 짧게 읊조렸다.


정다현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의 겉옷을 입히고 가방을 챙겼다. 이선자 씨는 아들을 붙잡지도, 며느리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배신당한 듯한 눈으로 평생을 함께 산 남편을 쳐다봤다. 김재명 씨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며, 아들이 앉아 있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님, 아버님, 죄송해요. 이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정다현 씨가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김지훈 씨는 이미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김지훈 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름진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김지훈 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아버지는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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