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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lySocks Mar 13. 2016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경알못이라 반박은 어렵지만..

저는 경알못입니다. "경제 알지도 못하면서/못하는 자"의 줄임말이고 요즘 온라인 상에서 많이 쓰는 은어 중 하나입니다. ㅎㅎ

중2때 우연히 수학 시험에서 작살이 나면서 생긴 제 숫자와 공식에 대한 트라우마는 결국 대학교 때 시험과목이었던 경제학원론에서도 처참하게 박살나곤 했습니다. 저는 일단 수요공급곡선이나  환율결정곡선 같은 그래프를 보면, 왜 이 변수를 가로에 놓고, 왜 이 변수를 세로에 놓는 거지? 바꾸면 안되나? 하는 쓸데 없는 원론적인 고민을 하는 유형입니다. 

기초가 이 모양이다 보니, 여전히 저는 금리가 내리면 환율이 어떻게 되고 부동산과 주가는 어떻게 되며...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가 하얘집니다. 이러한 변수를 예측한 재테크 내지 자산관리는 역시 꿈도 못꾸는...진정한 경알못입니다. ㅠㅠ


이 책은 일본의 한 소시민이 서른 살 이후 취업한 농산 도매회사에서 염증을 느끼고 4년만에 시작한 자연발효 빵집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수필 처럼 묶은 글입니다. 주로 균과 자연, 그리고 생명과 삶에 관한 이야기..천연 누룩균과 유산균, 효모를 이용한 제빵법의 개발과 안정화를 위한 피나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의 깨달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저자가 저자의 부친의 조언에 따라 읽게 된 맑스의 자본론의 기초적인 원리를 중심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 그러한 통찰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결함과 독성을 시정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영업 철학과 비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내용입니다. 미디어나 각종 서평에서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하고, 많이 팔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우연히 서점 구경을 하다가 흥미로운 내용과 제목으로 집어든 책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깨너머 또는 온라인 상에서 배운 비루한 경제학 지식으로는 저자가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자본론의 공리들이 잘 와 닿지는 않고, 아마도 그러한 공리를 비판적으로 논증할 논리는 아마도 경제학에서 차고 넘칠 것입니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미 여러 비판적 논평이 있지 않을까 짐작도 됩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감히 무엇을 비판할 만큼 비판의 무기로서의 경제학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경제체제하에서의 여러 현상과 시스템적 구조와 원리에 대하여 너무 단선적으로 판단하고 선악의 관념을 대입하여 설명하는 듯한 점은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의 신용창조와 같은 기능을 통하여 돈놓고 돈먹기 식의 자본과 유동성의 과잉 팽창이 나타났고 이는 마치 생명체의 영양과잉과 같이 볼 수 있으며 그 부작용으로 경제불황과 위기, 노동자의 희생 등이 나타난다는 등의 설명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적정한 기준점은 어디이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답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물론 대안 경영을 주창하는 가벼운 에세이식 인문서적의 저자가 그런 것까지 답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자본론이라는 이름을 걸고 책을 냈다면 그 정도의 고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집값이 거품 투성이고 조만간 폭락할 것이라던가 폭락하여야 살만해진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선이 정말 적정한 집값인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논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주장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보입니다.


대안 경영 모델로서, 가장 생명친화적인 제조법에 따른 상품의 개발과 판매를 통한 자립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여러 인프라 (온라인 바이럴마케팅이 가능하게 된 인터넷과 IT기술, 신속배송을 가능케 한 유통망 등)가 사실은 저자가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잉여자본의 투자를 통하여 창출된 것이거나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하여 집행된 것이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모델은 애당초 현재의 경제/사회구조에서는 예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델이며, "범용성"은 부여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번 읽어볼만은 한 것 같습니다. 

저자가 추구한, 어찌보면 일본인 특유의 집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인정신과 결부된 여러 '인프라'는 다시 한번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함을 느끼게 됩니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후 저자가 정착한 가쓰야마라는 동네, 전통과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지리적인 인프라, 물, 누룩과 효모, 양조장, 대나무 공예 장인 등은 그 자체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와 사회가 가진 거대한 힘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그대로 가져와서 병폐를 승계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실적형 사업과 연예인을 초대한 일회성 축제행사, 눈먼 보조금과 기간투자와 이를 빨아먹는 배타적 지방유지권력 같은 것은 아마도 일본에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적폐의 빈 공간에서 살아 있는 재생의 에너지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바탕이 존재한다는 것이 참 부럽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농림어촌 지역에도 70년대 이후 지어진 획일적인 콘크리트형 주택, 보조금 타먹기 위한 태양열 시설을 얹은 흉물스런 건물, 노랑빨강 총천연색으로 만든 모텔 산장 장어 막국수집 간판 말고, 좀 더 새로운....정말 지역의 재생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유명해진 집이고, 제가 이 글 쓴다고 치아바타 하나 공짜로 받을 일이 없는 집입니다만, 신제주 한화 아파트 상가에 "보엠"이라는 빵집이 있습니다.

잘 모르지만 젊은 분이 내려가서 빵집을 차리고 유기농으로만 만든다던가 한다던데요,

얼마 전에 제주에 놀러 가서 신제주에 사는 친구와 술이 떡이 되게 쳐 먹고 다음 날 술도 안깬 상태에서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들러서 치아바타랑 몇 가지 다른 빵을 사서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빵 참 맛있더라구요. 천연효모 뭐 이런 거 까지 안가더라도, 좀 더 좋은 품질과 노력으로 차별화된 사업모델을 만든다면, 이러한 멋진 장사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 가게는 이미 SNS상에서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것 같았습니다.

이게 정말 혁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혁신을 이루어내는 가게가 조금씩 더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한 명의 소비자로서 제 편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더 응원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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