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기본」
기본
흰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내일의 약속을 위해서
옷가게에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흰 티셔츠끼리
모여 있었다. 가슴에는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옆 가게에도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다른 티셔츠와
무더기로 쌓여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옷은 조금 더 저렴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옷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흰 것들을 모두 꺼내보았다.
흰 티셔츠는 저마다 다른 얼룩을 갖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얼룩에다 치약을 묻혀
비볐다. 지워지고 있는 얼룩을 이목구비가 허옇게 바래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지켜보았다.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탈수된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탁탁 털었다. 창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가
펄럭였다. 말라가면서 옷은 더 환해졌다. 내 방에는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갔다.
내일은 약속이 있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요즘 빨래가 잘 말라서 좋아요. 햇볕 좋은 날 널어놓으면 하루면 충분하네요. 겨울에는 사흘까지도 걸렸는데요. 글을 쓰는 지금, 데님 소재의 워크셔츠를 입고 있답니다. 워크셔츠 안에는 흰 티셔츠를 입고 있어요. 혹시 당신도 흰 티셔츠를 입고 있나요? 설레발이었으면 미안해요. 그래도 옷장에는 있겠죠.
티셔츠, 그 중에서도 ‘흰’ 티셔츠는 참 만만한 옷이죠. 만만하면서도 옷장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 아이템이죠. 감촉이 별로인 겉옷에 받쳐 입기 편하고요. 니트나 스웨트셔츠 안에 입어서 레이어드하기도 좋죠. 여름에는 청바지나 면바지에 단벌로 매치하기에도 충분하고요.
시를 읽고서 옷장을 열어봤는데요. 흰 티셔츠가 몇 장 있나 궁금하더라고요. 저는 다섯 장 있네요. 살펴보면 주로 잘 때 입거나 셔츠에 받쳐 입을 얇은 게 있고, 단벌로 입어도 속이 비치지 않도록 도톰한 게 있어요. 가장 오래된 건 5~6년, 얼마 안 된 건 2년 정도 됐네요. 목이 늘어난 것도 좁쌀만 한 구멍이 난 것도 있고요. 당신이 갖고 있는 흰 티셔츠는 어떤가요?
시에서는 약속을 위해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죠. 옷까지 사려는 걸 보니 소중한 약속인가 봐요. 우리도 그런 때가 있죠. 좋아하는 사람과 약속이 잡혔는데 옷장을 열어보면, ‘짜잔~’ 신기하게도 입을 옷이 없죠. 이것저것 꺼내서 입어보아도 흡족하지 않아서 새 옷을 살까 고민한 적이 당신도 있겠죠. 그렇게 화자는 티셔츠를 사러 나갔다가 되레 빈손으로 돌아와요. 점원의 말을 듣고는요.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맞아요, 기본 티는 이미 있죠. 근데 화자가 갖고 있는 흰 티셔츠에는 저마다 다른 얼룩이 있어요. 그리고 그 얼룩들을 치약으로 지우죠. 왜일까요? 김치찌개를 먹다가 국물이 튀어서 물든 빨간 자국, 필기하다가 소매에 묻은 잉크, 자전거를 타다가 바짓단에 엉겨 붙은 체인 기름때. 이렇듯 얼룩은 더러움이고 미숙함의 증표며 또한 어긋남이어서 숨기거나 없애고 싶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얼룩을 다르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얼룩은 기록이고 나의 습관이며 대변자라고 말예요. 거창한가요? 작은 흔적을 훈장으로 여기려는 건 아니지만요. 얼룩은 우리가 보낸 시간을 오롯이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보낸 생활의 내력을 꿰고 있다고요. 옷에 있어서는 얼룩뿐만 아니라 변색과 해짐 그리고 주름이 마찬가지겠죠. 이것들은 눈으로 보기에 완벽하진 않지요. 그렇지만 결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가 가진 하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산품인 티셔츠는 대개 비슷비슷하지만 얼룩은 각자의 생활방식대로 제각각이니까요. 그리고 새하얗고 반듯한 티셔츠보다는 한 구석에 얼룩진 티셔츠가 조금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니까요.
그래서 이 시가 왠지 모를 불편함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죠. 얼룩을 지우고 탈수해서 티셔츠를 널어두는 모습이, 가시적으로는 결점으로 여겨지지만 나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을 잃어가는 것으로 다가와서 말예요. 사람은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것과 숨기고픈 게 따로 있기 마련이죠. 옷을 입을 때 본인의 신체 강점은 드러내고 단점은 보완하듯이요. 하지만 한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게 정말 숨기고 고쳐야 하는 나의 단점인가?’. ‘이건 단점보다는 그 자체로 나인 게 아닐까?’하고요. 사람의 매력은 화려한 장점뿐만 아니라 어설픈 실수에서도 나타나니까요.
타인의 시선을 고심하기 이전에 결점을 달고 사는 자신을 잘 돌보는 데에 우리가 사는 기본이 있지 않을까 해요. 당장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자주 입다 보니 매력을 알게 되는 옷이 있죠. 그렇게 이 옷이 아니면 안 되는 때가 찾아오지요. 어쩌면 이것이 내가 나를 살아내는 한 가지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벼운 약속이 잡힌다면 오래 입어온 옷을 선택해보는 건 어때요. 혹여나 당신과 내가 길을 가다가 스친다면 각자를 잘 알고 있는 옷을 입은 채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에 얼룩이 있다면 어쩌다 생겼을지 남몰래 생각해볼게요.
소매가 해진 워크셔츠를 입고 있는 날
나무소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