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로 몸서리친 부모 슬하에서 자란 세대. 그중 시골에서 자란 이는 무척 적을 것이다. 나는 7년가량의 유년 시절을 경남 김해 장유에서 보냈다. 장유는 창원에 몰리는 인구를 분포하기 위해 신도시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 초반. 주택 단지가 조성되었으나 외곽에는 논밭이 있었다. 신설된 초등학교에 교내 식당이 만들어지기까지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자주 천을 따라서 등하굣길을 오갔다. 포장도로에 트랙터가 달달거리며 지나갔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소규모 도시와 시골의 경계라고 할까.
풀이 도톰히 자란 완만한 언덕에서 옆으로 누워 굴러 내려오길 좋아했다. 견학 간 날, 옛 금관가야의 왕이 묻혀 있다는 봉긋한 능을 볼 때는 참고 참아야 했다. 해가 떨어지는데 겁 없이 친구들과 산을 타기도 했다. 친구들과 천에서 물수제비를 떴다. 사마귀, 방아깨비, 잠자리, 다슬기, 물방개, 개구리를 잡았다. 비가 갠 여름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놀러 갔다. 고개를 위로 젖히면 장관이 펼쳐졌다. 하늘이 잠자리였고 잠자리가 하늘이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이부자리에 들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한가득 들어왔다.
헐렁한 첫 교복을 입은 열넷, 원래 살던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건물은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거리에 나가면 고요한 바람 소리 대신 차가 거세게 지나가는 소음이 들렸다. 산을 깎아 만든 동네라 길이 비탈졌다. 자전거를 타기 힘들었다. 도서관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가까워지면 미리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멀리 나가면 바다야 있었지만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며 들을 수 있는 물소리는 없었다. 대부분의 길이 포장되어서 풀밭을 걸을 때 조금 받쳐주는 푹신한 느낌도 없었다.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살던 곳을 다녀오곤 했다. 자라온 풍경을 아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새 공간에 발붙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부자리에서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반복했다. 이사 가는 날 친구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던 순간. 매해 여름 친구들을 불러 모아 했던 물놀이. 집과 학교 그리고 천이 흐르는 길을 포함해 내가 오간 모든 곳의 입체적인 구조. 물가에서 눈 감고 맞는 바람결. 담임선생님이 매일 아침 칠판에 한 편씩 써놓으셨던 시. 떠나오면서 그것들을 두고 온 게 아니라, 가져온 것이라고 느끼기까지는 한참을 감싸보아야 했다. 그때부터야 내 유년은 흘렀다. 돌이켜보건대 그곳에서 보낸 날은 감성적 자산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대체로 그때부터 보아 온 것이다. 청년이 된 지금에도, 흙과 물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물렁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