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10일 음식일기
"별 일 없나?"
"예"
"..."
"..."
"요새 재밌나"
(빛보다 빠르게)"아니요"
엘레베이터에서 나눈 짧은 대화. 마지막 말은 그냥 하지 말 걸. "재미를 좀 찾아야 될 것 같아요."
재미는 무슨. 선배는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가시고 여기부터 나의 갈 길이다. 내 주머니에도 빵 있지. 스콘.
홍차는 오후에 미리 마셔 두었다. 우르르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으며 걸으면 좀 부끄러울까? 아니지 이제 하고싶은 대로 하기로 했지.
겨울 오는 냄새가 난다. 옷깃을 여미고 빵 봉지를 열었다. 한 모서리씩 손으로 떼어내어 오물오물 입에서 녹여 보니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크림이 들어가서 부드러워요.' 딱 적당히 짭조름하고 꼭 알맞게 달았다. 한 모서리, 또 한 모서리, 천천히 음미하다가 딱 다 먹을 때 즈음 버스가 왔다.
좋은 사람이 파는 음식은 제발 맛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이 집에선 언제 한 번 실망한 적 없었지. 아주머니가 계산을 마치고 빵을 건네며 '감사합니다~'하고 말을 하면, 이런 걸 받고 인사까지 받아도 될까 싶어서 나는 "(더) 감사합니다!"하고 답을 한다.
밥으로 먹기엔 작고 달아서 그 동안 한 번도 사지 못했다. 오늘따라 생각이 나더니 행운의 마지막 스콘은 내 차지가 되었다. 헛헛한 퇴근길의 좋은 친구야.
점심 때는 빠알간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전냄새에 이끌려 홀린듯 들어간 곳이었다.
한 달 전 의문의 복통이 시작된 이래 섭식이 번뇌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먹는 일은 이미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데 쓰인 지 너무 오래였던 것이다.
아플 것을 알면서 꾸역꾸역 먹고 있을 때는 미련한 몸뚱이가 더없이 비루하다. 달리 어떤 방법이 없어서 그냥 먹고 아프고를 반복했다. 집에 오면 데굴데굴 구르다가 잠을 자고 아침에는 낑낑대며 일어나서 그날의 예비된 통증을 가늠하면서 슬퍼했다. 예상은 별로 빗나가지 않았다.
굶으면 덜 아픈 것을 알게 됐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어떤 날에는 일을 하면서 사탕 한 통을 다 먹었다.
콩자반과 무말랭이 무침이 나오고, 흑미가 조금 섞인 밥이 나오고, 마침내 찌개가 내 앞에 놓였을 때 덜컥 겁이 났다. 요며칠 좀 덜 아파진 것 같은데 내가 미쳤구나. 이 벌건 국물을 어쩌지...
전이 먹고싶어 온 것이니까 밥에 얹어 살살 먹다가 찌개에 든 두부를 뚝 뚝 잘라 밥그릇에 가져왔다. 영 싱거워서 국물을 몇 숟가락 끼얹었다.
남들보다 한 시간 늦게 갔더니 그 즈음 손님이 다 빠지고 테이블 족히 스무 개는 되는 큰 홀에 나 혼자 남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상이며 바닥을 닦는 언니들 수다가 귀에 쏙 쏙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 즈음 부터다.
"아니 아까 그 손님이 나한테 사과를 받아야겠대. 사과를!"
"깎아주지 않었어?"
"그랬지. 근데 나가면서 나한테 사과를 하래. 꼭 사과를 받아야 되겠대."
뭐 이런 얘기가 이어지다가
"글쎄 요새 내가 거울 보면 깜짝 깜짝 놀라. 어디서 이런 늙은 사람이 나타났나 하고. 내 손좀 봐 그렇게 곱던 손이 조글조글 해졌네"
"엊그제 딸하고 백화점에 갔거든. 옷을 입어봤는데 내마음에 쏙 드는거야."
"근데"
"딸이 사준다고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아이 별로다' 그랬어."
"비쌌어?"
"이십만원이었거든. 딱 좋던데. 딸이 계속 엄마 이거 사 내가 사줄게 하는거야. 아이 싫어 이거 마음에 안들어 그랬어."
위가 따끔따끔 해 올 것 같이 무서웠는데 숟가락이 빨라지는 걸 그냥 뒀다.
두부도 다 없어지고 밥도 다 없어지고 아... 국물도 거의 다 없어졌다.
그런데 오후에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낫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