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먹다만사과수집가 Sep 30. 2019

헬싱키_샌드위치 예찬

소박한 식사와 납작한 오이의 비밀

이 이야기는 오늘 먹은 양장피에서부터 시작하자.  연남동의 '힙' 돋는, 큰맘먹고 방문한 비싼 식당의 음식.


양념 휘휘 섞어 한참 먹던 중. 그래도 잘 보면 혼란한 가운데 피딴이며 갑오징어 따위가 아직 영롱한데...

저 넓적한 게 무엇인가. 오이 아닌가.

나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이 비린내를 무척 좋아해서 어릴때는 비누도 오이비누만 좋아했고 오이 못 먹는 사람을 보면 이런 신선한 느낌을 모른다고 괜히 놀리고 싶어 지기까지 하는데...


저런 널따란 오이엔 매번 '얼굴에나 붙이는 것'이란 인상을 받고 만다. 막대기형으로 썰거나 가늘게 채썬 것과 다르게 거부감이 드는데, 아마 입 속에서 말리어 접혀 구겨지는 게 싫은 모양...


납작하게 편 채 먹을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깨달음은 최근의 헬싱키 방문에서 얻은 것이다.

 

핀란드는 무민의 나라. 비행기에서 무민 에피소드 세 편을 돌려보고 또보고 또 보았다. 그 중에서도 봄의 첫날, 무민이 숲에서 겨우내 방랑떠난 스너프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에피소드는 아련하고 아련해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글썽여지는데...


이 에피소드는 무민마마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척,
척, 척,
척, 척, 척,
척, 척, 척... 척? 무민마마!

치즈에 오이 양상추 끝? 너무하다 너무해! 무민트롤은 이런 맛없는 걸 먹는단 말인가?


빨리 스너프킨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도시락 싸는 엄마를 재촉는 무민. 샌드위치 들고 종일 스너프킨을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않는데...


허기도 잊고 기다리다 해질 때서야  샌드위치 먹으며 처진 발걸음으로 시무룩하게 집에 돌아오는 무민을 보고 나는 속으로 말한다.


야! 스너프킨이 아니야, 도시락이야 도시락, 그런거 먹어서 힘이없는 거야...


헬싱키 한 호텔에서 처음 조식을 먹어본 날,  놀람과 안타까움만...


무려 20유로인데 맙소사.


2만6000원...?

앵글에 담기지 않은 쌀푸딩을 포함해도 몹시 험블하다. 계란도 삶은 것만 주고 저 두껍한 오이 뭐람. 풀때기가 없으니 먹기는 먹지만 흠.


또다른 호텔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사실 아침에 빵 한 쪽에 우유만 먹어도  불만이 있겠는가...그런데 돈이 아깝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와중에 늘 드는 생각, 저 오이 뭔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데..


깨달음은 마지막날 왔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가까스로 10인실 도미토리 잡아 눈물 흘리며 기뻐했던 날이다. 하루 숙박비가  호텔 조식 가격하고 별 차이 안 나는 곳.


엘레베이터에서부터 느껴지는 포스...

공짜야 공짜, 공짜, 공짜, 꺅!

그림에 없던 오이, 아니나 다를까 여기도 있네.

게다가 이 분홍색 싸구려 햄은 뭐람. (투덜 투덜)

그렇지만 마지막 날이니까... 한 번 먹어볼까?

척, 척, 척척, 척척척척척,
흠,
흐으음?

분홍색 햄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오이하고 합치니까 김밥 느낌인데?? 아련한 그 옛날 체육대회...흐으음?


오이는 저렇게 잘 펴서 납작하게 눌러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입에서 구겨지지 않고 아삭, 다른 재료들과 한 번이 씹어야하는 것이었다...


호텔에서 한 쪽만 먹던 빵을 저날 호스텔에서 먹고, 먹고, 또 먹고... 세 쪽이나 먹었다. 한쪽 더 먹을까 하다 가까스로 참았음.


오이가 맛있었는지, 공짜라서 맛있었는지, 배고프니 맛있었는지. 셋 다겠지?


결론은...

키이토스(kiitos) 무민마마, 키이토스!







작가의 이전글 이어쓰는 달리기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