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으로 똘똘 뭉쳐 펄떡펄떡 물을 헤치는 몸통의 생명력이 잘 표현되었다. 알록달록, 반짝반짝.
<산천어의꿈> 같은 제목이 잘 어울리겠는데.
이 축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형물을 보여주면, 무얼 하는 행사라고 생각을 할까.
물고기를 트럭떼기로 싣고 또 실어와 와르륵 물에 부어넣고 낚시놀이를 해 잡아 먹는, 그런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까.
올겨울 광화문 프레스센터를 지날 때마다 앞마당에 놓인 이 조형물을 보고 지브리 애니매이션 <붉은돼지>의 그 장면을 떠올렸다.
포르코로쏘가인간이던 시절의 마지막 기억이다. 허공에 은하수가 펼쳐져 별들은 끊임없이 위로 위로 이동하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그것은 별들이 아니라 전투기와 그 위에 오른 조종사들이다. 전범국의 수많은 조종사들. 친구! 친구! 목터져라 불러도 동료들은 대답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 튕겨져나온 주인공은 삶을 인간이 아닌 돼지의 모습으로이어가기를 선택한다.
체제 속에서 희생된, 선택지가 없던 자들. 소멸은 아름답게 그릴수록 서글프다. 저 조형물은 어쩌면, 물고기들 혼을 달래기 위한 상징물인가?
2019년 1월에 처음으로 이 축제장에 가 보았다. 한 해 전에 축제에 다녀온 후로 개장만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 장단에 한 번은 맞춰야겠다 싶어서였다.
산천어가 노니는 강에서 낚시를 하는 행사인가 싶었더니, 딴데서 키운 물고기를 트럭 단위로 실어다가 우르르 갖다 붓고 잡기놀이를 한다고 했다.
영 마뜩찮았다. 뭐에 그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생선회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주제에 횟집 수족관 앞에서는 늘 침울해져 자아분열을 겪곤 하는데,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너무 야만적인 거 아닌가도 싶었다. 즐거운 놀이란 건 이런 식으로밖에 만들지 못하는 걸까.
활기 넘치는 축제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실례였을까 생각마저 했다. 사람들이 몹시 즐거워보였기 때문이다.
낚싯대 드리워놓고 시간을 낚는 그런것이 아니었다. 얼음에 뚫린 구멍에 줄 드리워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먹이가 살랑살랑 흔들리게끔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물고기가 잡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게을렀고 아버지가 세 마리를 낚는 동안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 뿐이었다. 대체 지루함을 다들 어떻게 견디는 거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활기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즐거워 보여서 기뻤다.
나는 낚싯대를 내려놓고 축제장 이 곳 저 곳을 산책했는데 맨손으로 산천어를 잡는 현장은 정말 흥미로웠다. 주최측이 주는 오렌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물고기를 잡아서는 티셔츠 안에 넣고 또 넣고 하는 것이었다. 인간에겐 채집시절 사냥본능을 해소할 데가 필요한 것인가...
이 활동의 본질은 전적으로 노동이라는 것을,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신하게 되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을 수 없다! 잡아야 먹는 것이다... 같은 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으니 많이 잡을수록 이득인 것...
산천어를 가지고가면 회를 떠 주기도 하고 구워주기도 했는데, 구이통은 무슨 화장터나 납골당을 연상시켰다. 번호가 붙은 서랍이 주루루룩 있고 산천어를 호일에 둘둘 말아 한 마리씩 넣는다. 산천어의 주인은 번호를 받아갔다가, 그 서랍의 산천어가 다 익으면 가져가서 먹는다. 이제 서랍을 당겨 꺼내면, 펄떡이던 산천어의 투명하던 눈은 허옇게 변해있고 입은 벌어져 영락없는 시체 꼴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밥상에서 늘 보던 것이기도 하다.
회나 구이나 너무 맛있었다. 야만하네 지루하네 하면서 나는 결국 아버지의 노동에 묻어가 혓바닥과 목구멍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인간은 다른 종의 시체를 주워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일까. 그런 주제에 다른 동물보다 잘났다 여기는 꼴은 참 못 보겠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과 눈맞추며 '우리는 동등하다' 하는것도 좀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른 종과의 연대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왜 이렇게 모든게 불편한지 들여다보는 중이다. 기록해 두면, 후에 생각이 바뀌게 되었을 때도 그 경로를 되짚어볼 수가 있다.
올해도 산천어축제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이상기온으로 얼음이 얼지 않아 축제가 계속 미뤄지자 달력을 보며 몹시 조바심을 냈다. 마침내 문을 열자 곧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는데, 짧은 틈을 타 두 번이나 다녀오셨다. 이번엔 얼음 없는 낙시터에서만 고기를 잡도록 했다고 한다.
"지구가 이렇게 난동을 부리니, 이 축제가 계속될 수가 있겠습니까."
"선생님, 그럴리가요. 계속해야지요."
진행요원으로 나온 화천군 주민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인간이 부린 '만행'이면 만행이지, 지구가 '난동'이라니. 너무 신선한 표현이라서 메모해 두었다. 내가 어릴 때는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가 유행했고, 학교에서 환경보호 포스터 그리기를 시키면 너도나도 '모에화'된 지구를 그려넣었다. 눈물흘리는 지구, 난동부리는 지구. 어느 쪽도 지금 생각하면 본질에 그리 가까운 것 같지 같은데...
저 짧은 대화에서 화천군민의 착찹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씁쓸했다. 초등학교 주차장에 차가 꽉꽉 들어차던,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그 풍경에는 나도 신이 났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게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니고는 안 되는 걸까. 지역에 활기가 돌게 하는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