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만의 오롯한 시간에 대하여
이언 맥큐언 소설 <속죄>(영화 <어톤먼트>)에서 초로의 소설가는 살면서 저지른 큰 잘못을 고백한다.
그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 기억을 앗아가는 병보다 더 큰 형벌이 있을까.
마음 맞는 책을 만나면 한 문장 한 문장을 다 기억해 두고 싶다. 눈이 새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에도 방금 본 것을 잃을까봐 조바심이 난다. 깨끗이 보는 일은 포기했다. 그래도 펜으로 쓰면 좀 너무한 것 같아서 연필로,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말들을 스치며 떠오른 생각을 두서없이 받아 적는다.
중간중간 쉬어갈 수 밖에 없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삐딱한 자세로 따져묻기도 한다. 꼭 내 말을 들은 것처럼, 몇 페이지 혹은 수십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그 문제에 대해 입을 열 때가 있다. 그러면, 아. 그렇게 행복하다.
사실 나는 앉아서는 책을 잘 읽지 못한다. 느리게 걸으면서 읽으면 좋다. 손에 책이 있으면, 기다리는 열차가 대여섯 정거장 전에 있는 것도 기쁜 일이 된다. 출근길은 또 어떤가. 내것인 시간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았을 때 그 초조함이 문장을 더 빠르게 훑어나가게 한다.
읽을 때는 오롯이 나와 저자만 있다. 얼굴은 마주하지 않고 나란히 함께 산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책장을 여는 순간 저자는 튀어나와 나와 함께해야만 한다. 그의 시간을 내가 독점하는 것이다.
한동안은 그의 어투, 자주 쓰는 단어와 개념 같은 것들이 내게서 묻어나온다.
이야기는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때, 스크린에 불이 꺼지고 상영관에 조명이 켜지는 때 말이다.
우리는 기억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