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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Aug 14. 2018

열차는 시간을 싣고

몽골에서 러시아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몽골 테를지 국립공원에서의 하룻밤이 아쉽게 지나고, 또 새로운 곳에서의 하룻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원을 떠나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서 샤워와 짐 정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귀여운 낙타 인형을 선물로 받은 뒤 울란바토르 기차역으로 향했다. 몽골에서 러시아로 올라가는 열차는 상태가 꽤 좋은 편이라고 듣긴 했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시설이 꼼꼼하고 깔끔하게 잘 갖춰져 있어서 더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써야하는 4인실 쿠페에는 이미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셋은 그 어떤 어색함이나 불편함도 없이 23시간을 즐겁게 함께 보낸 일일 룸메이트가 되었다.



깔끔한 4인실 쿠페 내부



몽골의 초원에서 심심할거라 예상했지만 너무나 시간이 빨리 지나갔던 것처럼 기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옆칸에 있는 새로운 이들과 마주쳐 인사하며 각자의 나라에서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고, 서로 어떤 여행을 하는 중인지 묻고 답하며 긴 시간을 지루할 틈 없이 보냈다. 우리의 룸메이트였던 70대의 피터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무려 중국에서부터 몽골을 지나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가는 긴 여행을 하고 계셨다. 비행기는 타지 않고 오직 육로로만 여행을 하고 계셨는데, 접이식 자전거를 가지고 다니며 여행 중이신 정말 엄청난 분이셨다. 게다가 최근에 북한에 다녀온 적도 있으셔서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많으셨다.


피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움과 동시에 반성이 절로 되었다. 나이 서른이 뭐가 그리 많다고 이제 이런 배낭여행은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유난스럽게 여행을 시작했던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워졌다. 칠십여년을 살아오신 피터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겨우 스물여덟해를 살아온 나보다도 훨씬 초롱거렸다. 다른 나라의 역사나 문화와 정치에 대한 무한한 관심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말씀하시는 피터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심지어 삼국시대를 넘어 삼한에 대해서까지 내게 물으실 때는 우리나라 역사를 가물가물 기억하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카메라는 절대 다 담지 못하는 아름다운 노을



열차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다같이 모여 앉아 신나게 떠들다가도 중간중간 역에 정차할 때마다 다같이 쪼르르 달려 내려가 간식을 사오기도 했고, 노을 지는 초원을 바라보면서 함께 음악을 듣기도 했다. 밤 9시 반쯤이 되자 몽골의 수흐바타르역에서 출국심사를 하고, 한시간 반 정도 후에 다시 출발한 열차는 12시가 되기 전쯤에 러시아 나우스키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했다. 입국심사 역시 2시간 정도 걸렸는데 다들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으로 간이침대에 누워 심사를 받았다. 짐 검사를 하기도 하고 탐지견까지 들어와 심사는 꽤나 긴장되고 정숙한 분위기였는데 그 순간 또한 재미있었다.


몽골에서 비가 오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별을 열차 창문으로 빼꼼히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열차 안은 온도도 적당했고 매트릭스도 꽤 편안했다. 베개와 담요, 수건까지 줘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느 새 바이칼호를 지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바이칼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남은 빵과 음료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 조용히 각자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고 낙서를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바다같은 호수 바이칼호



그런데 여유로움도 잠시, 나에게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유심도 없었을 뿐더러 전파도 잘 잡히지 않던 열차 안에서 엄마에게 문자가 왔는데, 쓰지도 않은 신용카드로 250만원이나 넘게 결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무언가 인터넷으로 결제를 할 때 해킹을 당하여 카드가 도용된 것이었다. 다행히 엄마에게로 결제 내역이 바로 문자가 가서 곧바로 신고를 하고 분실 폐기 처리를 했다. 결국 여행을 시작한지 겨우 나흘만에 챙겨왔던 신용카드를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었다. 친구와 할아버지는 잠시 낮잠에 들었고, 나 혼자 깨어 있는 열차 방 안에서 몇 분간 마치 억겁의 세월이 흐른 것만 같았다. 바이칼호를 바라보고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얼마 후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우리는 열차 카페 칸에서 사온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어제 함께 모여 수다 떨었던 네덜란드인 커플과 함께 또 대화를 나누었다. 언젠가 내가 네덜란드에 가게 될 거라 말했더니 그들은 흔쾌히 연락처를 알려주며 연락을 달라고 했다. 큰 도시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 동네에 오면 재워줄 수 있고 가이드도 해줄 수 있다고. 이렇게 열차 안에서 좋은 인연을 또 만들었다. 피터 할아버지께도 주무시는 동안 몰래 그렸던 할아버지의 그림을 선물로 드렸다. 서로의 메일주소도 주고 받아 아직까지도 종종 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여행길을 응원하고 있다.



존경스러운 피터 할아버지와의 이별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23시간만에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2년 만에 다시 오게 된 이르쿠츠크였다. 그 때는 내가 이곳에 다시 발을 디디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오니 정말 반가웠다. 모스크바까지 쭉 열차를 타고 가시는 피터 할아버지는 열차가 떠날 때까지 우리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어주셨다. 반가운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함께 뒤섞였다.


열차는 다시 또 다른 이들의 시간을 싣고 유유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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