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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Feb 18. 2019

영어를 못해도 괜찮아, 어차피 잘 안 통하니까

러시아 이르쿠츠크 자유 여행의 맛



처음 이르쿠츠크에 왔을 때는 매년 도시가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6월의 축제기간이었기 때문에 도시 분위기가 따뜻하고 활기찼었다. 이번 7월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을 때에는 축축하게 비가 내리고 쌀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타국에서 전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기분은 참 묘했다. 마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아직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일부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 묘한 기분. 이제부터 진짜 긴밀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처럼 괜히 뿌듯해지고. 아무튼 그렇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왔던 이르쿠츠크에 이번엔 내가 다른 누군가의 손을 이끌고 다시 오게 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꽤 많은 사람을 마주했다. 먼저 러시아에 도착해 가장 처음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친구가 참여하고 있던 러시아 여행자들이 모인 오픈 채팅방의 방장님과 그 가족을 우연히 만났다. 게다가 알고 보니 나를 처음으로 이르쿠츠크에 인도했던 분이 그 단톡 방에 계셔서 우리가 간 그 식당을 추천해주셨다는 놀랍고도 신기한 이야기. (사실 나와 친구, 그리고 나를 러시아에 처음 데려가 주셨던 그분은 한 때 모두 같은 회사 동료였다.) 지금이야 같은 목적으로 모인 여행자라면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고, 서로 건너 건너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 당시 우리는 그 사실에 소름이 돋아 엄청나게 흥분했었다.


고려식당, 한국어 메뉴판도 있고 고려인 전통 국수가 맛있다.



그리고 몽골에서 쓴 투그릭이 남아 처분을 못하고 있었는데, 오픈 채팅방에 물으니 우리와 반대로 러시아에서 몽골로 가시는 분들이 있어 그분들과 만나 서로 환전을 하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무려 돈을 나누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일행 중 한 분을 통해 내가 미처 챙겨 오지 못했던 새 수건까지 하나 득템 했고, 내친김에 그분들과 다음 날에도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어차피 영어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바디랭귀지를 적극 활용해야 했다. 게다가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들 역시 우리가 한국인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국말로 말을 걸어왔으니.


그러니 러시아 여행을 하기 전에는 키릴 문자 읽는 법이나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외워가는 것이 유용하다. 안녕하세요(Здравствуйте 즈드랏스부이쪠)는 어려워서 끝끝내 잘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고맙습니다(Спасибо 스빠-시바)나 화장실(туалет 뚜알롓)은 나름 유용하게 잘 사용했다. 어느 나라에 가든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실례합니다', '화장실', '네/아니오'만 말할 줄 알아도 편하기 때문에 이후에도 나는 새로운 나라로 향하기 전에 항상 그 나라의 간단한 인사말을 외워갔다. 영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언어이든 완벽하지 않아도, 심지어 말끝을 흐리거나 잘못 발음을 하더라도 표정과 눈치는 대부분 잘 통했다. 물론 언어를 유창하게 잘하면 훨씬 더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겠지만, 언어에 자신이 없다고 여행을 못 하는 건 분명 아니었다.



한적한 이르쿠츠크 거리 풍경


러시아 트램



게다가 길 찾기야 위대한 구글맵이 있으니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러시아에서도 역시 구글맵이 유용하게 쓰였다. 보통 바이칼 호수를 보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머무는 여행자들이 많지만 우리는 짧은 일정으로 인해 바이칼 호수까지 가지는 못했는데, 대신에 시내 곳곳을 구글맵을 보며 잘 다닐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기 전에 항상 구글맵에 먼저 가고 싶은 곳들을 별로 찍어두고, 그 별들이 모인 곳을 구역별로 나누어 일정을 정했다. 혹시 가고 싶은 곳들이 딱히 없는 경우, 구글맵 탐색에서 관광명소를 누르면 웬만한 명소들이 표시가 되어 나타난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 싶다면 'Google Trips'라는 어플과 함께 사용하면 더 유용하다.



바브르 동상과 130지구 내에 있는 쇼핑몰


우리는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르쿠츠크의 상징 바브르 동상이 있는 쇼핑몰 130지구와 레닌 거리부터 마르크스 거리와 중앙시장, 러시아 특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카잔 성당과 재미있는 벽화가 그려진 아트 팩토리, 그리고 앙가라강을 따라 거닐며 모스크바의 문을 지나 키로바 광장까지 천천히 여유를 즐기며 이르쿠츠크를 만났다. 이 도시는 무언가를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는 도시여서 우리의 마음과 걸음에는 더욱 여유가 넘쳤다. 몽골과 러시아, 그리고 횡단 열차까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걸 다 경험하기에는 빠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우리의 여행에는 항상 느린 시간이 흘렀다.



카잔 성당의 예배


모스크바의 문과 앙가라강



여행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호스텔 주방에서 마트에서 산 러시아 명물이라는 '오믈(omul, 말린 연어 같은 생선)'을 맛보았다.오믈은 상당히 비리고 질려서 호불호가 꽤 갈리지만,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생선이니 러시아에 온다면 한 번쯤 맛볼 가치가 있다. 마침 한국에서 온 여행자와 러시아 할아버지가 주방에 계셔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칼로 질긴 오믈을 자르는 것이 쉽지 않아 가위를 찾아 연어를 잘랐는데, 그 모습을 보고 러시아 할아버지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셨다. 여행이 모두 끝난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은 주방 가위는 우리나라만 쓴다는 것.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 행동이 그분에게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지. 그리고 그날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연습의 시작이었다는 것도.



이제 러시아를 떠나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진짜 나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친구와 헤어지는 날까지도 국제선과 국내선 공항을 헷갈려 무거운 짐을 들고 허둥지둥 대던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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