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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Jan 31. 2021

아버지를 죽이는 딸

넷플릭스 숨은 명작 리뷰 -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 (일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처드 "딕" 존슨은 86세를 앞둔 전직 임상심리사이며 치매를 앓고 있다. 아직까지 명시적인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점점 쇠하는 기억력과 그에 반비례해 늘어나는 잠이 가리키는 것은 확실히 생명보다는 죽음 쪽에 가깝다.


그런 그에게 다큐 감독이자 촬영 기사인 딸 커스틴 존슨이 있다. 커스틴은 딕에게 이상하고 찜찜하며 어찌 보면 불경스럽기도 한 기획을 제안한다. 딕이 죽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영화로 찍어보자는 것이다. 딕은 수락하고, 그래서 이 작품 안에서 총 네 번 죽는다. 건물에서 떨어뜨린 화물에 맞고, 집안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거리에서 발을 헛디디고, 공사 현장에서 인부가 잘못 휘두른 자재에 목을 찔려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다. 그렇게 노인은 스턴트와 특수 분장의 힘을 빌려 난폭한 죽음을 경험한다.


건물에서 떨어진 물건에 맞아 숨진 딕 존슨 / 사진=넷플릭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픽션과 논픽션이 서로를 층층이 둘러싸고 있는 짓궂은 농담 같다. 극 자체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커스틴이 딕과 함께 이른바 '딕 존슨의 다양한 죽음들' 시리즈를 찍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메이킹 필름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되는 그 촬영의 결과물은 당연히 픽션이다. 베테랑 감독의 터치를 거쳐 그럴싸한 죽음의 장면들이 재현된다. 딕은 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천국에 가서 예수(존슨 가족은 제칠일안식교 신자다)와 여러 유명인들, 사별한 아내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딕 존슨의 죽음이라는 소재 자체는, 머지 않아 다가올 현실이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소크라테스와 딕 존슨은 사람이니까.




아버지의 가짜 죽음을 뷰파인더에 담는 감독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가장 우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종의 예방접종처럼 죽음을 예행연습함으로써 슬픔과 충격에 대비하는 것, 아버지에게 당신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 생전 영상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의 모습은 최대한 많은 영상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아마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촬영을 디렉팅하는 커스틴 존슨 감독 / 사진=넷플릭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는 감독의 기획도 대담하고 신선하지만,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딕 또한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상에서 그려지는 딕 존슨은 상냥하고 유머러스하며 귀여운 할아버지다. 딕은 손자들의 장난을 받아주며 즐거워하고, 촬영 스태프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며, 출장을 떠나는 딸에게는 "이젠 내가 너의 남동생이다"라고 하더니 많이 보고 싶을 거라며 눈물을 흘린다.


예수를 만난 딕 / 사진=넷플릭스


딕 존슨에게 이입한 관객이 그의 생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작품 내내 딕 존슨은 실제로 죽지 않는다. 그러나 이 쇠약한 노인이 화면에 담길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에 가슴을 졸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뒤로 넘어질 때, 차에 타자마자 그가 서 있던 자리로 화물차가 쌩 지나갈 때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이 드리워지는 것만 같다. 죽음이 꼭 낙상이나 교통사고 같은 충격적인 이벤트를 통해서만 환기되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의 86세 생일을 맞아 서프라이즈 케이크를 준비하고 있던 손자는 주방에 딕이 나타나자 보지 말라고 하다가, "할아버지는 어차피 금세 까먹으니까 괜찮다"고 납득한다. 수명이 거의 다한 노년의 삶은 그 일상의 모든 부분이 죽음을 연상시키는 메타포처럼 보인다.




작품을 보며 한때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던 '장례식 브이로그' 사건이 떠올랐다. 문제의 글쓴이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카메라를 들고 가 그날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영상으로 담으려고 했다. 이 광경을 본 글쓴이의 큰아버지는 대노하며 고가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빼앗아 박살을 내버렸다고 한다. 글쓴이는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글을 썼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도 큰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비난의 핵심은 영상을 촬영하는 행동이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톤 앤 매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브이로그'라는 단어 선택, 그리고 촬영자 본인이 영상의 주인공이 되어 끊임없이 나레이션을 하는 브이로그의 촬영 형식은 장례식의 분위기에 다소 부적절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비난의 기저에는 영상 촬영은 행사나 기쁜 일이 있을 때만 해야 하는 행동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고, 나는 거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그 매체가 펜과 종이일 때는 괜찮고 카메라일 때는 안 된다는 생각은 촌스러울 뿐더러 모순적이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딕 존슨의 딸이 영화인이기에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었던 기획이지만, 동시에 한국에 비하면 영상 촬영에 대해 더 관대하고 열린 태도를 가진 미국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커스틴 존슨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면 이 선댄스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걸작을 만들지도, 아버지에게 이렇게 멋진 선물을 해주지도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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