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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Feb 24. 2021

에리얼이 원하는 것

Part of Your World - 인어공주(1989)


Look at this stuff. Isn't it neat?
이것 좀 봐. 멋지지 않니?


에리얼이 플라운더에게 작은 쇠붙이를 보여주며 노래를 시작한다. 소중하다는 듯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물건은 어느 집, 어느 주방에나 있을 것 같은 포크이다. 에릭 왕자의 난파선에서 발견한 포크를 에리얼은 옆에 있던 촛대에 꽂아 놓는다. 세 갈래로 나눠진 촛대에는 마침 스푼과 나이프가 꽂혀 있었다. 에리얼의 수집품 목록에 새로운 물건이 추가된다.


촛대에는 원래 양초가 꽂혀 있어야 하겠지만, 평생을 바닷속에서 산 에리얼이 그걸 알 턱이 없다. 그리고 애초에 양초는 태워야 하는 물건, 물속의 양초는 있으나 마나다. 에리얼도 육지에는 '불'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어떤 그림 덕분에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다. 수집품들을 돌아보던 에리얼은 수면을 향해 천천히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으며 생각한다. 언젠가 저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지워질 뻔했던 명곡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89)]는 나를 포함한 밀레니얼들에게 거의 처음으로 만난 디즈니 영화 중 하나일 테다. 이 영화에 이런 삽입곡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가? 영화를 본 사람은 많겠지만 이 노래가 남긴 인상은 상대적으로 희미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성인이 되어 이 노래를 찾아서 들었을 때는 마치 심해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더 더 씨Under the Sea]에 비해 정적이고 차분한 템포의 발라드인 이 노래는 어린이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들린다. 에리얼이 '발'과 '거리', '불'처럼 인간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낯설어하는 이유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동경하는 감정도 사춘기 이전의 아동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인어공주]의 사전 시사회에선 한 아동이 이 장면에서 집중하지 못하고 들썩거리다가 팝콘을 쏟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시 디즈니 스튜디오의 회장이었던 제프리 카첸버그는 이 사건에서 느낀 바가 있었는지 [파트 오브 유어 월드] 시퀀스를 줄이거나 통째로 들어내라고 지시했다. 카첸버그의 눈에는 이 노래가 영화를 늘어지게 만드는 요소로 보였다.



카첸버그의 지시는 스태프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작사를 맡은 하워드 애쉬먼은 [파트 오브 유어 월드]를 없애기 전에 본인을 먼저 죽여야 할 거라며 버텼다. 그는 이 노래가 빠지면 관객들이 에리얼에게 매력을 느낄 기회가 사라진다고 봤다. 감독인 론 클레멘츠와 존 머스커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들은 [파트 오브 유어 월드]는 내러티브 상 [백설공주]의 [썸데이 마이 프린스 윌 컴Someday My Prince Will Come]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카첸버그를 설득했다. MGM의 중역들이 [오즈의 마법사] 속 불후의 명곡인 [썸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카첸버그와 비슷한 이유로 빼려고 했다는 것도 상기시켰다.


결국 [파트 오브 유어 월드] 시퀀스는 두 번째 시사회까지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관객들의 반응은 첫 번째보다 훨씬 좋았다. 사실 첫 번째 시사회 때는 시간관계 상 이 장면의 애니메이션이 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특히 수집품으로 가득한 동굴을 배경으로 에리얼의 주위를 도는 카메라워킹 작화는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부분이었고,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완성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팝콘 사건'의 원인은 노래가 아니라 화면이었을 수도 있는 셈이었다. 참고로 카첸버그는 이제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이 노래를 죽이려고 했던 그에게도 이제 [파트 오브 유어 월드]가 없는 [인어공주]는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이 되었다.




에리얼이 진짜로

원하는 것


[파트 오브 유어 월드]는 전형적인 '아이 원트 송I Want Song'이다. 본래 뮤지컬 용어인 아이 원트 송은 극의 도입부에 삽입되며, 말 그대로 주인공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 노래의 경우는 에리얼이 얼마나 지상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차후 에릭 왕자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우르술라와 맺게 되는 계약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인어공주]에서 이 노래가 빠졌다면 에리얼의 행적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감독들은 카첸버그를 설득하기 위해 이 노래를 [썸데이 마이 프린스 윌 컴]과 비교했지만,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그간 나왔던 디즈니 공주들의 발라드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갈망의 대상이 왕자가 아니며, 그 갈망을 에리얼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 나온 [썸데이 마이 프린스 윌 컴]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언젠가 와줄 왕자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노래다. [신데렐라]의 [어 드림 이즈 어 위시 유어 허트 메익스A Dream Is a Wish Your Heart Makes]는 왕자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고달픈 현실을 견디기 위해 '꿈'에 의존하는 다소 무기력한 내용이다(그리고 그 꿈이란 결국 무도회에서 왕자를 만나 계모의 학대에서 구출되는 것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언젠가 꿈에서 본 왕자에게 느끼는 감정을 고백하는 [원스 어폰 어 드림Once Upon a Dream] 역시 이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리얼은 에릭 왕자를 알게 되기 전에 [파트 오브 유어 월드]를 부른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에리얼이 왕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별개로 예전부터 인간 세계를 갈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감독들이 처음에 애쉬먼에게 주문했던 것은 에릭 왕자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을 표현한 가사였지만, 애쉬먼은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는 것이 작품 전체와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사랑보다는 호기심,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나서서 움직이고 쟁취하는 쪽을 택하는, 이전까지의 '공주'와는 조금 결이 다른 주인공이 탄생했다.



이 수정된 기조는 가사 곳곳에서 드러난다. 노래의 제목에는 'your'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가사에는 your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에리얼은 '당신 세상의 일부(part of your world)'가 아니라 그냥 '저 세상의 일부(part of that world)'가 되고 싶어한다. 로맨스의 대상으로 읽힐 수 있는 '당신' 대신 늘어난 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더 많은 걸 원해(I want more)"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어(I wanna be where the people are)"
"사람들이 춤추는 걸 보고 싶어(I wanna see, wanna see them dancing)"



어리석은 선택도

선택이므로


그렇다면 에리얼을 이전까지와 달리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욕망하는 새로운 디즈니 여성 캐릭터의 효시로 볼 수 있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조심스럽다. 결말부를 제외하면 안데르센 원작의 전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인어공주]는 결국 한 소녀가 처음 본 남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목소리를 잃는 이야기이며, 작가 클로에 에인절의 표현을 빌리면 "페미니스트의 최악의 악몽"이다. 영화의 악역인 우르술라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 영화의 결말은 "어리고, 날씬하고, 말이 없고 사랑에 빠진 '착한' 여자가 늙고, 살찌고, 말이 많고 문란한 '나쁜' 여자를 상대로 거둔 승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어공주]를 페미니즘 영화로 해석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윈 왓킨스는 한 칼럼에서 에리얼이 "디즈니 공주로서는 최초로, 바보 같은 것을 얻기 위해 최악의 거래를 할 정도로 충분한 주체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녀에게 속아서 하게 된 어리석은 선택일지라도 그것은 어찌 되었든 본인의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거나 인내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에리얼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조디 벤슨은 2019년 [버슬Bustle]과의 인터뷰에서 "1989년이 어떤 시대였는지 감안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앞의 공주는 1959년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였어요. 오로라와 에리얼 사이에는 분명 큰 발전이 있었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갑자기 2019년으로 도약을 했어야 하나? 잘 모르겠네요."


에리얼은 [뮬란]의 뮬란이나 그 이후 세대 작품인 [겨울왕국], [모아나] 등의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선배 세대의 '공주'에 더 가까운 수동적이고 답답한 캐릭터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진보에는 항상 과정과 계보가 있는 법이다. 동물 친구들과 노닐며 왕자님을 기다리던 공주가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는 중간 과정에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마녀와 최악의 거래를 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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