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rs Like Me - 타잔(1999)
I wanna know, can you show me?
난 알고 싶어요. 내게 보여줄래요?
I wanna know about these strangers like me
나와 닮은 이 이방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타오르는 램프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던 타잔이 흠칫 놀란다. 포터 부녀가 램프 위에 검은 상자 같은 물건을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영사기라고 불리는 그 상자는 텐트의 반대쪽 벽면에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사기는 타잔에게 익숙했던 세계와 낯선 세계를 번갈아 보여준다. 네 발로 선 우두머리 고릴라의 모습과 두 발로 선 성인 남자의 모습, 덩굴과 수풀이 우거진 정글과 빅 벤이 보이는 런던의 거리. 천체 관측, 책과 문자, 활동사진, 자전거. 자신과 닮은 이방인들이 가져온 모든 것들이 타잔에게는 경이롭고 궁금하기만 하다. 밤을 지새우며 영사기의 슬라이드를 갈아 끼우던 타잔의 눈에 한 장면이 아로새겨진다.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남자의 모습. 타잔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자리에 제인과 타잔의 모습이 포개어진다.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 20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 아아아~."
코미디언 최성훈은 90년대 초 MBC의 개그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에 출연해 이 노래로 그 당시 '국딩'들의 우상이 되었다. 일종의 돌림노래인 이 곡은 거듭해서 부를 때마다 팬티와 칼의 가격을 10원씩 올리는 것이 국룰이다. 가지고만 있어도 감가상각을 역행해 10원씩 가치가 상승하는 저 수상한 물건들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저 당시 한국에서 소비되었던 타잔의 이미지가 우스꽝스럽고 더러는 비루했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반라의 남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어려워 보였다.
몇 년 후 세기말, 디즈니의 [타잔(Tarzan, 1999)]이 개봉했다. 이 작품 속의 타잔은 물론 멋지고 터프한 모습이지만, 제작 비하인드 중에는 저 "10원짜리 팬티"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이야기가 있다. [타잔]은 디즈니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주인공이 삽입곡을 직접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 케빈 리마와 크리스 벅의 판단이었는데, 그 이유는 "발가벗은 남자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건 너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었다. 옷을 적게 입은 남자는 뭘 하든 없어 보인다는 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공감대였다.
필 콜린스의 음악은 하나같이 명곡들이었고 심지어 타이틀곡 [유일 비 인 마이 하트You'll Be In My Heart]는 2000년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받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노래하지 않는 디즈니 주인공이 큰 인상을 남기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90년대 '디즈니 르네상스'의 황혼을 장식한 [타잔]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어느 시점, 한국의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타잔이 다시 소환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해외 연예 커뮤니티인 해연갤의 한 사용자는 디즈니의 모든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타잔]의 한 장면이 가장 '꼴린다'며 그 포인트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가 움짤로 들고 온 부분은 [스트레인저스 라이크 미Strangers Like Me]의 후반부, 제인과 타잔이 함께 덩굴에 매달려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위대한 쇼맨]의 [리라잇 더 스타Rewrite the Star]를 연상시키는 로프 안무를 펼치던 두 사람은 이내 서로에게 휘감기며 시선을 교환한다. 특히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제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타잔의 표정과 움직임이 사람들을 열광시킨 핵심이었다. 물론 타잔이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음을 숨기지 못하는 제인의 상기된 표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음험한 오타쿠 어른들의 '착즙' 정도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뚜렷한 밀도의 에로티시즘이 이 전체이용가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었다.
실제로 해외의 한 칼럼니스트는 [애니메이션 속 타잔을 섹시하다고 생각해도 되는가]라는 글에서 이 주제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2016년 개봉한 실사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분한 타잔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이 정글남의 성적 매력은 '10원짜리 팬티'의 이미지에 가려져 간과되어 왔었는지도 모른다.
[타잔]의 원작은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의 원작자이기도 한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의 [유인원들의 타잔Tarzan of the Apes]이라는 소설이다. 버로스는 작품 특성상 [유인원들의 타잔]이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생전에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버로스는 [유인원들의 타잔]을 통해 그런 아쉬움 정도는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부와 명성을 얻었다.
1912년 발표된 이 모험 소설이 초유의 히트를 쳤던 배경에는 당시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던 제국주의가 관련돼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타잔은 영국의 귀족 가문 태생이다. 고귀한 혈통의 백인 남자가 문명과 이성의 이름으로 야만과 비합리의 세계를 정복한다는 이야기는 당시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던 미국의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야생에 버려졌던 무력한 소년이 타고난 지혜와 능력으로 정글의 왕이 된다는 전개는, 백인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배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우생학을 전제하고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이를 두고 이렇게 비아냥대기도 했다.
"타잔은 아프리카 정글의 왕인데 백인이에요. 아프리카 전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다 때려눕히고, 사자의 턱주가리도 돌려요. 동물들과 얘기도 하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몇 백 년간 거기 살아도 그렇게 못해요. 오직 타잔만 할 수 있죠."
버로스가 죽은 뒤 반세기가 지나 만들어진 디즈니의 [타잔]은 원작 소설과는 여러 가지로 결이 다른 작품이다. 버로스의 타잔은 전형적인 정복자로, 그에게 동물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용하거나 잡아먹을 수 있는 존재였다. 총기 같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디즈니의 타잔은—여전히 백인이지만—동물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고릴라 무리의 한 구성원이며, 우두머리인 커책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다양한 위험들로부터 동족들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클레이튼에게 총을 겨누는 데까지 성공하면서도 "당신 같은 인간은 되지 않겠다"며 입으로 탕 하고 총소리를 흉내 내더니 총을 집어던져버린다.
문명/야생, 현재/과거, 백인/유색인종 등의 대립쌍으로 구성되는 '백인 구원자' 서사에는 성별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다. [포카혼타스]의 존 스미스,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 등의 숱한 사례에서 저 대립쌍의 앞쪽은 항상 남성의 속성이었다. 종합하면 백인-구원자(정복자)-남성인 주인공에게 있어 다른 세계의 여성은 '이국적인' 로맨스의 대상이자, 모험하고 구원해야 할, 혹은 정복해야 할 세계를 의인화한 상징물이다. 이 구도에서 여성 관객은 항상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디즈니의 [타잔]에서 이 관습은 묘하게 비틀린다. 즉 남자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던 '백인'의 속성이 클레이튼과 제인에게 나뉘어 할당된다. 클레이튼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복자이자 파괴자인 백인의 모습이라면, 그 반대급부로 제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탐구와 (타잔에 대한) 계몽이다. 그 결과 [타잔]은 여성인 제인이 남성인 타잔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이끌어주는 조금 색다른 구도의 인물 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결국 갈등을 해결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인공인 타잔이다. 그러나 항상 여성에게만 주어졌던 순수하고, 순수하기에 무지한 캐릭터성이 타잔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새로운 세계를 더 보고 싶고 알고 싶다는 내용의 [스트레인저스 라이크 미Strangers Like Me]는 이런 점에서 [파트 오브 유어 월드Part of Your World]를 성반전시킨 데칼코마니처럼 보인다.
이쯤에서 다시 타잔의 성적 매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새로운 타입의 '왕자'가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이다. 플로리안(백설공주), 필립(잠자는 숲 속의 공주), 에릭(인어공주) 등 클래식한 디즈니 왕자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멋진 패션과 매력적인 화술, 완벽한 매너를 갖춘 신사이다. 반면 타잔은 사실 왕자도 아닐뿐더러 (영국의 백작이긴 하다) 앞에 열거한 왕자의 미덕 중 그 무엇도 갖추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우월한 힘과 근육(!)이 있다.
이러한 타잔의 모습은 현대 여성의 연애 판타지 중 하나인 '잘 생기고 몸도 좋지만 나밖에 모르는 모질이', 소위 '너드미'의 전형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관능적인 몸짓으로 덩굴을 타며 (조금은 핀트가 어긋난) 여성 관객들의 군침을 돌게 만들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동물들의 친구'를 연기하는 타잔의 원작 소설이 실은 구시대적인 남성 판타지였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여성주의적 재전유라는 점에서 묘한 전복감을 준다.